저녁에는 조금 느려도 괜찮다
"저희 열차는 다음 역에서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는 일반열차입니다."
이런 방송이 나오면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려다가도 도로 나온다. 빠르게 가려면 녹색 열차는 떠나보내고 빨간색 열차를 타는 게 맞다. 급행열차에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탄다. 획일적인 빠름. 급행열차가 급행인 이유는 많은 이들의 목적지가 뻔히 정해져 있기 때문인가 보다. 아침에는 모든 것이 빠르다.
어서 일하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대는 설렘을 느낄 때보다 지각할까 봐 뛰느라 숨이 찰 때가 더 많다. 설령 전자와 같은 워커홀릭이 있더라도 그런 사람과는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 아침마다 시간에 쫓기는 이유. 조금이라도 집에 머물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최대한 늦게 출발하고 싶다. 집을 나서는 시간이 늦으니 출근도 빠듯하다. 이동은 어떻게든 빨랐으면 좋겠다. 이러니 새벽에 기상한들 무슨 소용이려나 한다. 9시가 다 돼서야 눈치 보며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저녁이 되면 아침의 기민함은 사라지고 감각도 무뎌진다. 늦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시계토끼처럼 집에 돌아가는 길 마저 분 단위로 체크하며 민감하게 굴고 싶지 않다. 여전히 자신에게 엄격한 이도 있다. 집이 먼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 가는 게 중요하다. 마치 지하철역에 기차를 타러 가는 사람처럼 바삐 걷는다. 직주근접 생활을 하면 저녁 시간만큼은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저희 열차는 송파나루 역에서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는 일반열차입니다. 급행열차를 이용하실 분께서는 다음 열차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방송이 나오면 바로 탄다. 오히려 좋다. 아침저녁으로 효율성과 속도를 따지면서 살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다. 누구나 빠른 걸 좋아한다. 빠른 자동차, 빠르게 버는 돈, 빠르게 환승하고 하차할 수 있는 지하철 출입문 번호…. 급행은 항상 사람이 몰린다. 그에 반해 일반열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좌우 양 끝자리가 비어있을 때가 많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급행이면서 끄트머리 좌석도 비어있는 열차를 타고 싶은 건 과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등과 팔을 기대어 앉는다. 마음이 겸손해진다. 서둘러가려는 사람들 속에서 느림을 좇으려니 죄책감이 든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내려오니 마음이 편하다. 남은 미련도 놓아버린다. 눈을 감는다. 빠르지 않아도 된다. 송파나루 역에서 열차는 멈추고 문은 오랫동안 열려 있다. 안전선 너머를 바라봐도 타는 사람은 없다. 다음에 도착할 급행열차를 기다린다.
Photo by Adi Goldstei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