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와 술의 힘을 빌어 밝히는 출판사의 진실
정어리 :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을 쓴 사람인데요. 매장에 책이 없어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서점 직원 : "아~ 네.."
정어리 : "(자료를 내밀며) 한 번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점 직원 : "아 예…."
정어리 : "안녕히 계세요…"(도망치듯 퇴장)
'또 한 명의 영업사원이 왔구나.'라고 쓰여있는 듯한 서점 직원의 표정을 보며 애써 미소를 짓습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발가락부터 정강이까지 축축해지는 날씨였습니다. 중요한 일을 하나 처리했으니 주위를 두리번. 낭패입니다. 어딜 봐도 금연구역입니다. 고백하자면 영업을 다닐 때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었습니다. 서점 문을 열기 전에 한 대, 인사하고 나오면 다시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한 대를 피워야 했습니다. 끽연을 마친 후엔 축구선수 호날두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프리킥을 차기 전에 하듯이 '후!' 하고 숨을 내뱉어야 조금이라도 후련했습니다. 책에는 키우는 고양이를 생각해서 금연했다고 자랑하듯 써놓고 정작 자기 책을 알리러 돌아다닐 때는 흡연을 했던 언행불일치 저자였습니다.
지난번 주말에 하루 여덟 지점, 광고인 박웅현 작가의 책 <여덟 단어>처럼 한 곳씩 지점을 다니며 영업할 때마다 이 길이 나의 길이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지난 주만 해도 마치 영화 <소울>에서 사후세계에 다녀와 새 삶을 사는 음악 선생 조 가드너처럼 삶의 생생함을 솜털로 느끼는 기분을 만끽하지 않았느냐며 자문합니다. 가슴 한 구석에 뭉쳐있는 긍정감을 움켜쥐어 보았습니다. 이번 주말엔 수유점, 은평점, 영등포점, 디큐브점, 목동점, 합정점까지 여섯 지점을 완주했습니다. 1주차엔 구두, 2주차엔 운동화를 신고 홍대입구 근처 조각피자집에서 평소엔 먹지도 않는 맥주를 홀짝이고 있으니 얼굴이 금방 달아올랐습니다.
출판사에서 책정한 마케팅 예산이 결코 적지 않은 액수임에 한 번, 그 많은 돈이 크게 티 나지 않는 몇 번의 프로모션에 각설탕 녹듯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두 번 놀랐습니다. 음악이 꺼지면 회전목마가 멈추듯이 이제 파티를 끝낼 시간입니다. 딱 그 시점부터 마케팅이라는 접점을 교차한 저자와 출판사는 각자 갈 길을 갑니다. 돈이 떨어지면 더 이상 함께할 일은 없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편집자와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줄어들면서 싸늘하게 식는 책의 온기에 세 번째로 놀랐습니다. 혼자서 자기 책을 알리러 돌아다니는 저자는 검은 천으로 두 눈을 질끈 동여매고 걷는 것처럼 앞이 캄캄합니다. 서점을 돌아다닐 때마다 출판사에서 나오셨냐, 왜 저자가 직접 왔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서운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출판사와의 계약. 책을 받아 지문이 닳도록 넘겨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던 출간의 기쁨. 책이 서점에 깔린 뒤로는 판매부수와 순위 걱정을 하느라 작가의 본질인 쓰는 삶에서 멀어져 버립니다. 키보드를 놓은 동안에도 다른 누군가는 항상 앞을 보며 달리고 있습니다. 마감에 쫓기는 사람은 저자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출판사 내에서도 편집부는 책이 세상에 나온 뒤로는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마케팅 담당자의 몫이니까요. 드문드문했지만 가끔이라도 화기애애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던 편집자는 당장 다음 기획과 출간 일정에 맞춰 다음 작가와의 밀회를 시작한 지 좀 되었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나니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았습니다.
회사에서 매월 사보를 기획하고 취재하고 발행까지 혼자 다 하는 선배가 생각났습니다. 선배는 항상 바쁩니다. 전문 업체가 붙어서 협업한다지만, 이건 뭐 코너 기획부터 표지 촬영까지 북 치고 장구치고 난리도 아닙니다. 매월 10일 경이면 책이 나옵니다. 그때쯤이면 선배는 이미 다음호 면을 무슨 글로 채워야 할지 고민합니다. 발행인만 아닐 뿐 1인 편집자이자 출판인인 선배가 걱정하지 않는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과월호입니다. 꾸준히 돌아오는 반품 택배를 낙엽처럼 긁어모을 때 말고 선배는 지난 호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제 책은 자기 계발서이지만 사실은 잡지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제 초 인기 잡지까지는 아니었던….
며칠 후면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 초순인데 지난 3월호 내용에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과월호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합니다. 휴가 때 부대에 돌릴 잡지를 사러 맥심 코리아 본사에 찾아갔었을 때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책도 꽃처럼 한 철만 사랑받지 않으려면 적어도 맥심만큼의 매력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듭니다. 아니면 절기에 관계없이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된다거나요. 이도 저도 아니라서 나는 오늘도 혼자 영업을 떠나나 보다 생각하니 조금은 분합니다.
저자인 나 자신마저 여기서 포기한다면 며칠도 지나지 않아 저의 책은 매대에서 사라질 겁니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책을 보고 만지고 펼쳐보는 경험의 중요성을 책 덕후로서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번듯한 매대에 책이 누워 있어야 비로소 책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릴보이의 노래 '내일이 오면' 가사처럼, "여기 책이 살아요!"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보문고 중에 교내 서점을 제외한 전 지점 순회 영업 마침표. 하루 종일 인사를 다니느라 힘들었지만 주문 넣어드리겠다는 말 한마디에 마냥 저의 삽질이 헛되지만은 않음을 느꼈습니다.
초보 저자 정어리의 조언 ⑩
축하합니다. 힘드셨죠? 직장 다니면서 책을 내다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몇 가지 알아두실 것이 있는데요. 서점도 회사입니다. 출판사도 회사이고요. 서점 직원 분들도 출판사 직원분들도 작가님과 같은 직장인이랍니다. 자 여기 눈물 닦으세요…. (티슈를 건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