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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뷔페 Part1

삶을 다운로드하는 시대

by sarihana

프롤로그

인생이 거대한 뷔페라면 어떨까. 긴 식탁 위에 수많은 요리가 차려져 있고, 접시를 들고 원하는 삶을 마음껏 담을 수 있는 곳. 모두가 완벽한 요리사, 완벽한 예술가, 완벽한 리더가 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세상. 하지만 그 완벽함은 과연 진짜일까? 우리는 남이 만들어놓은 요리를 맛보는 것에 만족하며, 정작 내가 직접 만든 서툰 음식의 온기를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된다. 뷔페 입구에서 멈춰 선 채 한없이 망설이던 한 젊은이의 이야기, 그리고 텅 빈 접시 위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제1부: 공허한 초대장

제1장: 텅 빈 접시


졸업식장의 열기가 숨 막히게 다가왔다. 단상 위 총장의 연설은 의미 없는 소음이 되어 귓가를 스쳐 지나갔고, 빌려 입은 가운 안으로 스며드는 눅눅한 공기는 꼭 내 불안의 무게 같았다. 수천 명의 학사모가 만들어낸 검은 물결 속에서 나만이 외딴 섬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난 4년의 결실을 자축하며 미래를 향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만, 내게 졸업은 마침내 당도한 거대한 절벽이었다.


"…여러분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총장의 목소리가 확신에 찬 어조로 강당을 울렸을 때, 나는 오히려 숨이 턱 막혔다. 무한한 가능성. 그것은 내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내 머릿속에는 거대한 뷔페가 펼쳐졌다. 긴 테이블 위에는 '개발자'라는 이름의 화려한 랍스터 요리, '벤처 투자가'라는 고급 스테이크, '데이터 과학자'라는 정교한 디저트가 끝도 없이 놓여 있었다. 동기들은 저마다 접시를 들고 환호성을 지르며 원하는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뷔페 입구에서 텅 빈 접시만 내려다본 채,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부터 맛봐야 할지, 어떤 것이 내 입맛에 맞을지, 만약 첫 번째 음식이 맛없으면 어떡해야 할지, 그 끝없는 질문들이 내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기계적으로 단상에 올라가 땀으로 축축한 손에 졸업장 통을 건네받았다.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와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미소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모두가 내게 박수를 보냈지만, 그 소리는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한 공허한 메아리 같았다. 나는 텅 빈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마크가 어깨를 툭 쳤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봐, 졸업 축하해! 믿어지냐, 우리가 드디어 해냈어! 난 다음 주부터 구글로 출근이야. 너는? 혹시 그 스타트업 계속 다니는 거야, 아니면 다른 계획이라도?"


그의 가시 돋친 친절함이 심장을 찔렀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얼버무렸다. "아직... 생각 중이야. 좀 쉬면서." "하긴, 너 정도 실력이면 어딜 가든 환영이지! 그래도 너무 오래 쉬지는 마. 실리콘밸리는 1분 1초가 다르다고!"


마크는 악의 없이 내 등을 두드리고는 다른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생각 중'이라는 말은 '아무 계획 없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실력'이라는 그의 칭찬은 오히려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22세, 대학 졸업.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말이 도리어 저주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나의 요리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수많은 요리를 맛볼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자신만의 코스 요리를 정하고 맹렬히 달려가는데, 나는 여전히 뷔페의 입구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 길이 내게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더 나은 선택이 있었는데 놓친 거라면?'


식이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인파 속에서 부모님을 만났다.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아버지는 말없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눈빛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밤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축하 파티의 소음은 멀어지고, 방 안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불을 켜자,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이력서 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뷔페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의 텅 빈 접시 같았다. 무엇 하나 담아내지 못한, 그래서 더 초라하고 막막한. 나는 의자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만 한참을 응시했다. 무언가 써 내려가야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하얀 공백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내 스물두 살의 졸업은, 그렇게 막막한 어둠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제2장: 실리콘밸리의 유령


실리콘밸리의 심장부,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자리한 좁고 어수선한 스타트업 사무실은 늦은 밤의 열기로 후끈했다. 형광등은 위태롭게 깜빡였고, 열악한 환기 시설 탓에 식어버린 커피와 피자 박스 냄새가 퀴퀴하게 뒤섞여 공중에 떠다녔다. 쓰레기통 위로는 며칠 째 쌓인 피자 박스가 위태롭게 층을 이루고 있었고, 화이트보드에는 세상을 바꿀 거라던 복잡한 알고리즘이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미완성의 그림처럼 내 마음도 늘 미로였다.


나는 며칠째 밤샘 코딩으로 뻑뻑해진 눈을 비볐다. 모니터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는 마치 내 심장 박동처럼 불안하게 떨렸다. 프로젝트 마감일은 코앞인데, 수백 줄의 코드가 얽힌 버그는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나를 조롱했다. 동료들은 이 코드를 완성하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우리가 혁신의 선두에 설 거라고 열변을 토했지만, 정작 내 세상은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안에는 그들의 열정을 따라갈 만한 불꽃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직도 안 갔어?"


에너지 드링크 캔을 든 알렉스가 다가와 내 화면을 힐끗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밤샘의 흔적과 함께 특유의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흔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눈빛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버그, 여전하구나. 조금만 더 하면 될 거야! 다음 주 투자자 미팅 전까지만 끝내면, 우린 로켓을 타는 거라고!"


알렉스의 목소리에는 의심 한 점 없는 열정이 넘쳤다. 그는 이미 성공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로켓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나는 로켓을 타고 싶다는 열망조차 희미했다. 그들의 꿈은 선명하고 컸지만, 내 접시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따뜻한 저녁 식사의 온기를 잊은 채, 근처 델리에서 사 온 차가운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밤이었다. 동료들이 갓 배달시킨 피자와 중국 음식 상자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하고 기름진 냄새가 사무실에 진동했고, 나는 그 온기가 부럽게 느껴졌다. 그들은 저마다의 확신에 찬 얼굴로 미래를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들 사이를 떠도는 유령 같았다.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채, 나는 내 존재가 점점 더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멀리 보이는 다른 테크 기업들의 빌딩이 화려한 불빛을 뽐내고 있었다. 네온사인처럼 밤하늘을 수놓은 그 불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성공 신화, 누군가의 혁신적인 아이디어, 누군가의 열정적인 밤샘으로 지어진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차가운 도시의 야경일 뿐이었다. 저 불빛들은 나를 격려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의 막막한 미래를 비웃는 듯했다.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모르는 나의 텅 빈 접시처럼, 나의 앞날은 어둠 속의 미지였다.


나는 성공의 심장부라 불리는 실리콘밸리 한가운데서 완전히 길을 잃은 유령이었다. 이대로 투명해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풀리지 않는 버그와 함께 밤새 깜빡이는 모니터 불빛뿐이었다.





제3장: 화면 속의 속삭임


자취방으로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나는 소파에 시체처럼 몸을 던졌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손에 든 스마트폰 액정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SNS 앱을 열었다. 화면에는 졸업식 날 이후 더욱 화려해진 동기들의 성공 퍼레이드가 끝없이 펼쳐졌다. 마크는 '구글 신사옥에서의 첫 일주일'이라는 제목의 브이로그를 올렸고, 영상 속 그는 자유분방한 동료들과 웃으며 최첨단 기술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는 방금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며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진을 게시했다.


그들의 빛나는 삶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내 공허함을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질투심과 자기혐오가 뒤섞여 숨이 막혔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소파 저편으로 던져버렸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꺼지자, 방 안에는 완벽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내 절망감만이 거대한 괴물처럼 부풀어 오르며 나를 삼킬 듯이 맴돌았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이 질식할 듯한 침묵을 깨고 싶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노트북을 열었다. 의미 없는 영상이라도 보며 뇌를 마비시키고 싶었다. 고양이 영상, 게임 스트리밍... 몇 개의 영상을 생각 없이 클릭하던 그때, 자동 재생 목록의 다음 영상으로 넘어갔다. '당신의 삶을 재설계하십시오'라는 썸네일과 함께, 미니멀한 무대 위에서 한 남자가 연설하는 영상이었다.


나는 넘기려던 손을 멈췄다. 영상 속 남자는 스티브 잡스를 연상시키는 검은 터틀넥 차림으로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선택의 기로에서 길을 잃어본 적 있으십니까? 잘못된 선택으로 수년을 낭비할까 봐 두려우십니까? 그 모든 불안과 시행착오를 과거의 유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요? 수십 년 훈련이 필요한 외과의사의 정교한 손기술, 베테랑 변호사의 논리적인 언변을 단 몇 분 만에 다운로드하여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닙니다. 바로 뉴럴링크의 경험 이식 칩이 열어갈 미래입니다.”


나는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심장에 박혔다. 영상은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로 전환되었다. 한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평생 음치였지만, '절대음감' 패키지를 다운로드하고 단 하루 만에 피아노를 연주하게 됐어요."


남자는 다시 화면에 나타나 결론을 내렸다.


“당신은 더 이상 선택의 기로에서 고통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뷔페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우리가 여러분께 드리는 초대장입니다.”


‘인생 뷔페’. ‘초대장’. 그 단어들은 단순한 광고 카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사기일까? 허황된 광고일까? 희미한 의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절박함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나는 미친 듯이 관련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화면 가득 화려한 광고와 '인생이 바뀌었다'는 후기들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잘못된 선택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실패의 고통 없이 완벽한 성공을 경험하세요.’


모든 문구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내 모든 불안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었다. 나는 그것이 절망의 늪에서 나를 건져줄 유일한 동아줄, 자유를 향한 초대장이라고 믿기로 했다. 떨리는 손으로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해 '상담 신청'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어두웠던 방 안이 노트북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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