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빵집 (확장판) - 외전 VIII

빵이 전하는 위로

by sarihana

외전 VIII. 손님들의 이야기: 네 개의 조각


조각 1. 오늘의 빵: 플레인 스콘

가장 완벽해야 하는 날, 나는 도망쳤다.

숨 막히는 대기실, 온몸을 조이는 실크 드레스, 백합과 헤어스프레이가 뒤섞인 어지러운 공기. "신부님, 정말 완벽하세요!" 친척들의 찬사는 나를 옭아매는 밧줄 같았다. 나는 사랑하는 그를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정해놓은 ‘완벽한 신부’라는 역할로부터, 그 완벽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웨딩드레스 자락을 구겨 쥔 채 무작정 달리다 보니, 낡은 골목의 빵집 앞에 서 있었다. 화려한 웨딩 케이크와는 정반대의 모습. 나는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요란한 행색에 잠시 시선이 쏠렸지만, 주인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뜻한 우유 한 잔과 함께 플레인 스콘 하나를 내주었다.

퍽퍽할 것 같았던 스콘은, 입안에서 의외로 부드럽게 부서졌다. 버터의 고소한 풍미가 혀끝을 감쌌다. 완벽하게 네모나지도, 동그랗지도 않은 모양. 한입 베어 무니 후드득 부스러기가 떨어져 순백의 드레스 위로 점점이 흩어졌다.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던 '완벽'에 생긴 첫 흠집.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모습이었다는 걸. 조금 부서지고, 헝클어지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 스콘은 애써 아름다운 케이크가 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한 신부’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나는 스콘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그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 그런데, 우리 결혼 케이크 대신 스콘으로 하면 안 될까?" 솔직하고, 조금은 엉뚱한, 우리의 진짜 시작을 위해서.


조각 2. 오늘의 빵: 크림빵

어둡고 차가운 PC방, 수많은 키보드 소음 속에서 모니터 위의 ‘불합격’이라는 세 글자는 나에게만 들리는 거대한 비명 같았다. 세상이 무너졌다. 3년간의 노력이 단 세 글자로 부정당했다. 부모님의 기대 어린 얼굴이 떠올라 숨이 턱 막혔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발길이 닿은 곳은 빵 냄새가 나는 작은 가게였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릴 적 먹던 크림빵 하나를 주문했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나의 성적표를 묻지 않을 위로가 필요했다.

빵집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크림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폭신한 빵과 달콤한 크림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둑이 무너지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짠 눈물과 달콤한 크림이 입안에서 뒤섞였다. 나는 실패했는데. 위로받을 자격도 없는데. 이 빵은 왜 이렇게 다정한 걸까. 이 빵은 내가 몇 등인지, 어느 대학에 떨어졌는지 모른다. 그저 나에게 달콤함을 줄 뿐이다.

나는 울면서 빵 하나를 전부 먹었다. 실패의 맛은 썼지만, 크림빵의 맛은 달았다.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내게는 이 달콤한 위로 하나쯤은 허락되는지도 모른다. 빵집을 나서며,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 용기를 냈다. "엄마, 어디세요?"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빵의 단맛이 남은 입술을 달싹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첫마디를 내뱉었다. "엄마, 나… 할 말이 있어.“


조각 3. 오늘의 빵: 마들렌

아내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어제는 내 이름을 불렀지만, 오늘은 나를 보고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우리의 50년 세월이 아내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지워져 가고 있었다. 나의 하루는 아내의 텅 빈 눈을 마주하며 시작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매일 오후 ‘시간의 빵집’에 들러 마들렌을 하나씩 사 가는 것이다. 아내가 유일하게, 아주 가끔씩 기억의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맛. 젊은 시절, 우리가 처음 만났던 찻집에서 먹었던 바로 그 조개 모양의 과자다.

그날도 나는 마들렌을 사 들고 집에 돌아와, 멍하니 창밖을 보는 아내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내는 무심코 마들렌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 두 입. 언제나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실망감에 고개를 돌리려던 바로 그 순간,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보, 이거… 당신이랑 연애할 때 먹었던 거네. 그때 비가 왔었나?”

나는 숨을 멈췄다. 아내의 흐릿했던 눈동자에 아주 잠시, 스무 살의 그녀가 돌아와 있었다. 단 몇 초의 기적. 아내는 금세 다시 텅 빈 눈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그 순간을 붙들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의사는 기억을 되돌릴 수 없다고 했지만, 이 작은 마들렌 하나가 아내의 가장 빛나는 시간 속으로 나를 잠시 데려다준다. 내일도 나는, 이 기적의 조각을 사러 빵집에 갈 것이다.


조각 4. 오늘의 빵: 바게트

“우리 헤어지자.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익숙했던 카페, 익숙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낯선 문장. 7년의 연애는 그렇게 끝났다. 내 세상의 절반이 아무렇게나 뜯겨 나간 것 같았다. 정처 없이 걷다가, 빵 냄새에 이끌려 ‘시간의 빵집’에 들어섰다. 나는 길고 단단한 바게트 하나를 샀다. 꼭 지금의 내 심정처럼, 겉은 딱딱하고 속은 텅 비어 보이는 빵이었다.

자리에 앉아 바게트를 힘껏 반으로 부러뜨렸다. ‘우드득’ 소리가 마치 내 속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뜯어낸 단면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녀와의 추억이 있던 자리들이 검은 구멍이 되어버린, 꼭 지금의 내 마음 같았다.

나는 구멍 뚫린 빵 조각을 아무렇게나 씹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겉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속은 텅 빈 줄 알았는데, 씹을수록 질기고 고소한 맛이 올라왔다. 구멍과 구멍 사이를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글루텐의 힘줄들이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지금의 나도 이 바게트 같지 않을까. 속은 텅 비고 구멍이 숭숭 뚫렸지만, 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직 남아있지 않을까. 나를 아껴주는 친구들, 가족, 그리고 나 자신의 아주 작은 힘. 이별의 고통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은 아니라고.

빵집을 나올 때, 나는 남은 반쪽의 바게트를 품에 안았다. 여전히 아프고 허전했지만, 신기하게도 더 이상 부서져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그녀와의 사진 대신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첫 문자를 입력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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