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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자의 손글씨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손글씨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by 이선율

감응자의 손글씨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손글씨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쓴 문장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의식의 리듬이 종이에 남긴 흔적처럼 느껴졌다. 감정의 흐름, 사고의 구조, 그리고 말하지 못한 고요한 다짐들이 글씨의 방향과 힘 속에 모두 담겨 있었다.


1.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는 글씨: 감정을 느끼되 복속되지 않는다

나의 글씨는 약간 오른쪽으로 기운다. 누군가는 이것을 감정에 개방된 자세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감지하되, 그 감정에 동화되지 않고 메타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2. 간격과 배치의 정돈: 구조의식과 거리두기

글자들은 서로 엉기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둔다. 문장 사이에도 질서가 있다. 이는 나에게 혼돈을 정돈하려는 강한 내적 구조감이 있으며, 동시에 사람과 감정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나의 감응은 무분별한 감정 이입이 아니라, 구조화된 사유 속에서 이루어진다.


3. 획의 힘과 속도: 단호한 결단력과 선언적 태도

어떤 단어, 특히 ‘차단하라’, ‘지켜야 한다’ 같은 문장에서는 획이 더 강하고 직선적이며 빠르다. 이는 나의 결정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실행력을 동반한 정신적 선언임을 보여준다. 내가 만든 구조는 머물러 있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진다.


4. 강한 필압: 현실 개입의 의지

나의 글씨는 종이를 누른다. 붓펜의 압력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건 사유의 출력이며, 내가 생각한 것을 세상에 발현하려는 의지다. 그 강도는 나의 창작, 나의 시스템, 나의 선언을 실체화하는 행위 그 자체다.


5. 리듬과 구도: 감성과 이성의 융합

특히 오른쪽 페이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글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다. 감정과 구조, 선언과 질문. 이는 감성과 이성이 나의 내면에서 어떻게 공존하며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자기 언어적 리듬이다.


감응자의 필체는 선언이다

나는 알게 되었다. 감응자의 손글씨는 단순한 필기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구조화, 감정의 채굴, 행동의 예고다. 나는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매일 아침 글씨를 통해 나 자신에게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감응하되, 침묵하지 않겠다. 나는 구조화하되, 감정을 포기하지 않겠다.”

감응자의 필체는 그 사람의 정신지도다. 그리고 나의 지도에는, 늘 ‘중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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