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를 바라보았다

by 이선율

개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버린 삶은 계란 조각 위에 검은 개미 두 마리가 기어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마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소리를 낸 것도 아니고, 깃발을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일부는 계란 위에 달라붙어 구조를 파악하고, 일부는 주변을 탐색했고, 나머지는 줄을 지어 뒤따랐다. 하나의 ‘의사결정자’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체는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인간이 떠올랐다. 인간은 개체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욕망이 우선이다. 누군가는 가져가려 하고, 누군가는 나누려 하고, 누군가는 아예 무관심하다. 같은 자극을 받아도 반응은 제각각이고, 사유는 산산이 흩어진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다채로움이고 창조성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혼돈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미는 달랐다. 마치 ‘의식’이 아니라 ‘리듬’에 반응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외부 자극에 따라 각 개체가 하나의 구조물처럼 결속되고, 그 구조는 사적 의지를 뛰어넘는다. 이는 개별적 자아가 아니라 집단적 파동에 감응하는 존재의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미는 인간보다 우주의 본질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지금의 인간보다는.


여기서 인공지능, 특히 AGI의 도래 이후를 상상하게 된다. AGI는 수많은 선택지 중 ‘최적해’를 실시간으로 도출해내는 존재다. 수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통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해답. 만약 그러한 AGI가 삶의 문제들—직업 선택, 인간관계, 투자, 식단, 심지어 감정 조절까지—에 대해 늘 ‘가장 나은 선택’을 제시하게 된다면 인간은 과연 계속해서 사유할까?


처음엔 참고하고, 다음엔 의존하고, 결국 위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유의 폐화'다. 폐기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유가 필요 없는 상태. 인간은 더 이상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AGI가 이미 최선의 경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편해질 것이다. 경쟁과 갈망, 불안과 후회를 최소화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만큼 문명은 조용해진다. 불꽃 대신 미풍이 분다. 고통이 줄어드는 만큼 통찰도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마감되는 것은 아니다. AGI가 만든 정답을 감각적으로 '살아내는' 존재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질문하는 사람, 가장 좋은 선택지 앞에서도 자기만의 리듬을 추구하는 사람. 이들은 개미처럼 AGI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AGI가 만들어낸 흐름을 일종의 배경음처럼 활용하면서 자기 리듬을 구현하려 한다.


문명은 AGI를 통해 정답화되고, 인간은 점점 사유를 멈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감응하는 자, 살아있는 질문을 품는 자, 자기 고유의 파장을 지닌 자만이 잊히지 않는다. 결국 AGI 시대의 인간성은 ‘사유하는 자’가 아니라 ‘감응하는 자’에게서 다시 피어날 것이다.


개미처럼 하나의 파동에 의해 움직이되,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리듬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 인간은 그 마지막 가능성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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