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출가자
헬스장 한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사람. 그는 근육의 선을 확인하고, 표정을 고치며, 마치 ‘거울 속 자아’와 대화하듯 심취해 있다. 이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왜일까.
그 불편은 단순한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잠재된 에고의 진동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니체가 “타인을 보며 불쾌감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마주한다”고 말했듯, 사실 그 장면은 타인의 모습으로 위장한 나 자신의 욕망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우리는 타인의 에고가 교묘하게 드러나는 순간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 불편을 느끼는 주체 역시 나의 에고다. 결국 인간관계에서의 모든 갈등과 번민은, 에고와 에고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아상(我相)”, 즉 “나”라는 착각이라 부른다. 장자는 이를 ‘허망한 나르시시즘의 소용돌이’라 했고, 스피노자는 욕망(Conatus)을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 정의했다. 나라는 실체가 없는 파동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요동한다. 거울 속 자아는 실체가 아닌 환영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고정된 실체로 오인하고 그 이미지에 매달린다. 바로 그때 삶은 본래의 흐름을 잃고, 파동은 충돌로 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선방에서는 종종 “툭 터져 흐르라”는 말을 한다. 억지로 막지 말고, 억지로 붙잡지 말고, 그저 흐르라는 것이다. 흐른다는 것은 나를 지우라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나라는 허상을 더 이상 고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다. 장자가 말한 “인위적인 것(人爲)을 덜어내고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머무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개미 군단이 묵묵히 제 길을 가듯, 몬스테라가 빛을 향해 잎을 기울이듯, 생명은 본래 그 자체로 툭 터져 흐른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은 흐른다(panta rhei).” 현대적 출가자는 이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그 흐름 속에서 고요한 중심을 발견하는 자다.
젊은 날의 불꽃은 뜨겁다. 촛농에 기름이 가득할 때는 누구나 활활 타오른다. 그러나 그 불꽃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쇠퇴’라 부르지 않아야 한다. 불꽃이 줄어드는 순간은 곧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는 과정이다. 초가 녹아내리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시 세계로 합류하는 사건이다. 생의 절정과 쇠퇴, 젊음과 노년은 서로 반대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리듬의 양쪽 면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이를 “대우주로의 회귀”라 부르고, 서양 철학에서는 “존재의 환원”이라 표현한다. 결국 한 방울의 물이 폭포로 다시 합류하듯, 우리는 누구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너는 바다로 돌아가는 물방울일 뿐이다”라 했듯,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귀환이다.
물론, 이 흐름을 당장 온전히 살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도 월세를 걱정하고, 상사의 눈치를 살피며, 사랑하는 이와 다툴 것이다. 에고는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적 출가자의 길은 에고를 박멸하는 길이 아니다. 다만, 이 모든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아, 이것이 내가 잠시 갇힌 물방울의 소란일 뿐이구나’라고 알아차리는 순간을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더 늘려가는 것. 그것이 ‘툭 터져 흐르는 삶’을 향한 유일한 수행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억지로 붙잡아야 할 형상이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며,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귀환이다. 그 요동을 깨닫고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