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되고 싶었어.
얼마 안 되는 기자 생활에서 발제 다음으로 힘든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당직을 꼽을 테다. 자유로운 영혼에게 내근은 그 자체로 형벌이요, 죄요, 폭력이다. 오탈자 검수 외에 신문 인쇄 과정에서 수정 사항이나 기사 교체가 필요할 경우, 보통 당직자가 편집기자에게 전달하게 되는데 아직 저연차 입장에선 선배들에게 대신 부탁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다른 신문이 중요하게 다룬 내용을 우리 회사가 놓쳤을 경우(쉽게 말해 물먹으면), 그 책임이 당직자에게도 부여되기 때문에 타지 동향 체크도 부담이 된다.
당직에서 가장 어려운 업무는 아이러니하게도 밥 주문이다. 정해진 시간에 최선임자에게 찾아가 오늘의 메뉴를 물어보면 십중팔구 "너네 먹고 싶은 거"라는 답이 돌아온다. 후배들 입맛을 배려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어디 밥 고르는 게 쉽나. 어느 누구도 불만 없을 메뉴가 뭘까, 울면서 배민 애플리케이션(앱)을 수없이 뒤진다. 언제부턴가 원하는 메뉴를 정해주는 데스크와 당직을 서고 싶어졌다.
몇 안 되는 연애 경험에서, 순박한 얼굴로 "너 먹고 싶은 거 먹자!"라는 말만 고장난 축음기처럼 반복했던 일이 떠오른다. 딴에는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내가 얼마나 매력 없고 답답했을까ㅜ
모시는 부장과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은 어느 날이었다. 개별 방이 마련된 한정식집은 높은 분들끼리 인사를 나누기엔 안성맞춤이지만, 배고픔 해결이 중요한 직장인에겐 그다지 선호하는 장소는 아니다. 그날도 나는 애꿎은 조기만 여러 번 뒤적였다. 혹시 가시에 살 붙은 게 더 있을까 싶어서.
회사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자마자 나는 배가 고팠고, 굳이 이 사실을 부장께 알리진 않았다. 당신도 배가 차지 않았을 거라 믿기에. 그날 부장은 당직 데스크를 맡았고, 나도 당직이기에 우린 두 끼를 함께 할 운명이었다. 저녁만큼은 그간 먹어보지 않은 기깔나는 메뉴를 시켜, 간만에 상사에게 점수를 따리라 마음먹었다.
고르고 골라 찾아낸 메뉴는 베트남 쌀국수. 면이다 보니 평소 시키지 않은 음식인데, 새로운 저녁 메뉴에 다들 반가운 눈치였다. 아싸, 됐다.
고수 추가쯤이야. 옵션을 추가하고 주문 완료.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됐다.
"송사리야, 근데 고수 안 왔다?" / "예? 어 그러네요. 식당에 전화 한번 해볼까요?"
"아니다, 그냥 먹자"
비닐봉지 안을 뒤져보니 잘게 썬 고추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나는 식당에 전화할 마음도 없었으면서 저런 말을 꺼냈다. 뭐가 들어있건 쌀국수는 오지 않았는가. 그래도 찝찝한 마음에 주문내역을 살폈다.
응? 뭐지? 왜 고추 추가가 된 거지? 부장은 분명 고수 추가를 요청했고, 나는 추가를 했는데. 왜 고추를 추가했다고 뜨는 거지?
누가 내 스마트폰을 해킹한 게 분명했다. 범인을 잡아야 했다. 식당의 주문 화면을 다시 들어갔다.
응. 내가 범인이었다. 추가라는 단어가 써진 네 항목 중 대충 보고 눌렀는데, 그게 고수가 아닌 고추였던 것이다. 정작 내가 주문해야 할 고수는 저~~ 아래 있었다. '고수 추가'가 아닌 '고추 추가' 추가를 눌렀다니. 좀 억울하긴 한데, 내 과실은 분명했다.
뻥 안 치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식당이 잘못한 것처럼 둘러댔는데, 내 잘못이었다니. 사실관계 자체가 어긋난 것 아닌가. 의도치 않게 남 탓한 게 맘에 걸렸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다른 회사 부장님께 고민을 토로했다.
다른 회사 부장님은 근처에 화분이 없는지 물었다. 잎을 따다가 고수라면서 넣어드리라는 것. 캬. 역시 사회생활 오래한 짬바는 역시 달랐다. 그 임기응변이 왜 내겐 없는 걸까.
분명 타당한 대안이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질병관리청을 출입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 부장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나를 불렀다.
"와 고수 넣었으면 진짜 맛있었겠다 송사리야"
회사 동기한테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부장은 고수를 무지 좋아한단다.(분명 지금 부장 N년째 모시는 건 난데..) 그 말을 듣자 내 속은 더더욱 타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잘못해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고수를 못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개봉하지 못한 고추로 두들겨 맞을 게 분명했다.
"예예"라며 안타까운 표정만 지은 채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근처에 고수 파는 곳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 사이 이미 부장은 쌀국수 흡입을 마쳤고, 다시 나를 불렀다.
"후기 보니까 이 집이 배달 실수를 자주 하나보네"
진실은 모르겠지만, 저 분이 날 살린 것만은 분명하다. 덕분에 내 잘못을 이실직고할 새도 없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여전히 죄책감은 남아 지금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렇게 발걸음이 무거울 수가 없었다. 지난 몇 개의 글에서 드러나듯 현재 원치 않은 인사이동에 대해 불만이 큰 상황이다. 직전 출입처에서 나름 날고 길던 나를, 감히 여기로 보내 팔다리를 묶어놔? 하는 느낌이랄까. 근데 정작 고수와 고추도 구분 못하는 바보가 여기 있었다. 회사가 폐급인 나를 데리고 있어준 거였구나. OTT로 그렇게 욕하던 성윤모가 지금, 우리 회사에 있었다.
그리도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사람 만나는 게 일이다 보니 어느 정도 '가오'가 중요한데, 혹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기초적인 음식 주문도 못하는 폐급이란 걸 알아차릴까봐. 점점 소심해지고, 어리버리해지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잃어버리니 매일매일이 사고의 연속.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나 이 일 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