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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홍 Jan 13. 2019

문화 찐따, 문화 허세.

그들의 기준

2018년은 신조어 급식체(?)가 휩쓸어 놓고 간 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처음 듣고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괴기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진 않았다.
그런데 문화 찐따의 줄임말 ‘문찐’이라는 단어는 꽤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새로운 문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문화 찐따.
그리고 최근들어 듣게 된, 전시나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을 일컬러 말하는 문화 허세.
‘문화 찐따’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때 생겼던 의문은 ‘새로운 문화’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였다.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문화의 기준.
또 문화 허세를 말하는 그 문화의 기준.
급변하는 사회에 흔히들 불리우는 ‘꼰대’들은 문화 찐따인가?
며칠 전, 패스트 푸드점의 주문기계를 서성이며 젊은 친구에게 주문방법을 묻던 어르신이 계셨다.
그나마 나는 컴퓨터와 함께 자라온 세대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에도 어색하긴 하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주문방법을 몰라 묻던 어르신에게 문화 찐따라 말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세월이 흐르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때가 올텐데 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힌다.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이 보편적이지 않다면, 그건 또 문화 허세라고 불리는것 같은 이 상황이 혼란스럽다. 보편적이지 않아봤자 그냥 전시를 보거나, 연극을 보고 조금 비싼 돈을 들이더라도 음악을 들으러 간다. 이것이 사치이고, 허세를 부리는거라 말하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좋은게 좋은지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사실 여기서 나를 멈추게 했던 말은 ‘좋은게 좋은지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문화생활을 하면서도 별 감흥을 못느끼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좋아하던 밴드의 공연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고, 좋아하는 유형의 전시를 가도 이미 알고 있다고, 또 이미 본 거라고 그냥 지나치고 마는 나는 또 다른 유형의 허세를 부리고 있는것이 아닌가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결국 이런 문화 찐따나 문화 허세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 일정수준의 보편화에 갇혀 옴짤달짝 못하게 만드는 감옥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 찐따라는 말도 사실, 급식체라고 불리우는 그들의 세계 급식을 먹고 있는 그들 중 다수가 좋아하는 문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찐따라는 프레임을 씌우는것이고, 문화 허세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돈을 지불하고 즐긴다 하여 허세라는 프레임을 씌우는것뿐 아닌가라는 생각.
개취존중이라는 말도 있듯이. 왜 개인의 취향까지 규범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사실 알면서도 소속되어있지 않다는 불안함을 타인에게 떠넘기며 덜으려는것인지.
그냥 본인이 좋다고 느끼는것에 투자하고 가치를 찾는것을 존중하고, 개인취향의 독립을 독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실은 꽤나 상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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