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위로
나름의 이유라는 것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나름’에서 오는 이유들이 모든 부분에 공정하게 파생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공적인 나름엔 인색하지만, 사적인 나름엔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기준의 기준을 두다 보면 그 경계가 애매해지는 것이다.
SNS가 우리의 삶에 더 집요하게 파고든 이후로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가면 우울증’이라는 말이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보여지는 삶에 집착하게 되고,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숨기다 보니 텅 비어 가는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남에게 기준을 맞추다 보니 정작 나의 삶에 집중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지인의 행복한 모습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사회 활동의 전반에서 다양하게 영향을 끼친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니, 사실 우리는 나의 기준에도 한참이나 동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니, 사실은 모든 이유를 ‘어쩔 수 없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내가 불행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생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건들로 범벅되어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로 받아 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름의 이유로 힘들어도, 어쩔 수 없이 힘들어야만 하는 상황들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온다.
조금만 틀어서 생각해 본다면 물론 힘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단지 포기함으로써 오는 내려놓음 밖에는 되지 못하는 상황도,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도.
곳곳의 멍든 곳이 계속해서 방치되는 상황 속에서 그저 버텨야 하는 것이 집중된 모든 상황들이 과연 합리적인 것이 가에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는 시간을 한 번쯤 가져보자고 나름의 서툰 위로를 건넨다.
개인은 힘이 없지만, 개인 모여 무리가 되고, 그 무리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파장은 커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