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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언 Jan 12. 2022

어느 날 남편이 베트남으로 발령났다

어쩌다 호치민 마담 #프롤로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낯선 환경에 던져진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갑작스러운 남편의 호치민 발령 덕분에베트남 호치민에서 나는 6년 동안 이방인으로써 살게 되었다.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그냥 남들보다 긴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랬더니 이방인 생활이 즐거워졌다. 여행이 설레는 건 여행지에서 평소에 해보지 못했던 도전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오토바이도 타고, 베트남 친구들과 같이 여행도 가고, 현지인 맛집에 도전하면서 낯선 타지에서의 삶을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6년 동안의 베트남에서의 일상탈출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종종 돌아보게 한다. 이 글은 6년의 시간에 대한 정리이다.  






어느 날 남편이 베트남 지사로 발령 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공식적인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베트남 발령이 거의 확실하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고, 이변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베트남 발령 소식에 막막해하고 있으니, 남편이 네이버 베. 맘. 모(베트남 맘 모여라) 카페에 가입해 보라고 했다. 베. 맘. 모는 베트남에서 살고 있거나, 살아갈 또는 살았던 한국 맘들을 위한 카페로, 베트남에 가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치는 입문코스 같은 곳이었다. 자의로 베트남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처럼 피치 못하게 베트남에 살게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베트남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최선의 준비를 해야겠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실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지, 이삿짐은 어떻게 준비할지, 출국 전까지 어떻게 지낼지부터 해결해야 했다. 살 집은 두 달 먼저 호치민에 도착한 남편이 구하기로 했다. 집을 구하기에 앞서 호치민 어디에서 살 지부터 결정해야 했다. 호치민시는 12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인들은 주로 2군과 7군에 거주한다. 2군은 한인을 포함한 외국인들 거주지역이고, 7군은 한인 거주 지역이라 처음 베트남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7군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특히 한글을 배워야 하는 자녀가 있는 경우 한국어 노출이 많은 7군이 더 낫다. 영어에 더 많이 노출시키고 싶다면 2군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은데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바로 2군으로 입성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었다.


우리는 호치민 생활을 7군 푸미흥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지역이 결정한 후 남편은 본격적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부동산 웹사이트가 있어서 원하는 지역과 아파트, 대략적인 평수와 가격대를 먼저 확인한 후, 부동산을 방문해 집을 보여 달라고 한다. 베트남은 월세로 임대 계약을 하고, 부동산을 통해 월세나 공과금을 납부하거나 불편사항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좋은 집주인을 만나는 것만큼 좋은 부동산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남편은 몇 곳의 부동산을 접촉해 매일 집을 보러 다니고, 집 구조와 인테리어 사진을 찍어서 내게 메신저로 보냈다. 신기한 했던 점은 베트남은 강한 햇볕 때문에 남향보다는 북향의 집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열 곳 정도 집을 본 후에 결국 우리는 전임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집 구조는 아파트마다 달랐지만, 전임자가 그 집에 사는 동안 불편 없이 지냈다는 이야기에 무난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호치민에선 흔한 수영장 딸린 아파트


집이 결정되었으니, 이삿짐을 정리해서 컨테이너로 보내야 했다. 호치민은 일 년 내내 여름 날씨라 여름옷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출국까지 남은 두 달 동안 입고 지낼 옷들을 뺀 겨울옷들과 긴소매 옷은 헌 옷 수거하시는 분께서 처분했다. 베트남 음식에 대한 경험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참치, 스팸 통조림, 라면, 쌀 등을 한국 식재료를 사쟀다. 한국 책은 구하기 어렵다고 해서 전집을 가능한 많이 준비하기로 했는데, 당시 3살, 5살인 아이들은 발령기간 동안 초등학생이 되는지라 필요한 책들은 미리 사가야 했다. 나는 때 이른 초등 학부모가 되어 초등 저학년 필독서들을 검색해서 중고서점에서 구입하고, 서점에 없는 책들은 지인 찬스를 통해 구해서 실었다.


외국인 친구들이 집에 올 때마다 놀라는 전집들


컨테이너 한가득 짐을 실어 보내고 남은 한 달은 양가 부모님 댁을 번갈아 다니며 지내기로 했다. 한창 예쁠 때 베트남에 손주들을 보내게 된 부모님들의 서운함을 그렇게라도 달래 드려야 했다.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게 된 부모님들은 좋아하시면서도, 이내 등 돌리면 눈물짓곤 하셨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어린이날 선물로 비행기 태워주겠다며 공항에 데리고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들은 비행기 타고 아빠 본다고 좋아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아들 둘을 데리고 호치민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5년 5월 5일 밤 11시, 드디어 호치민 떤섯년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를 맞아주는 건 후텁지근한 공기와 불 꺼진 도시였다. 다행히 먼저 호치민에 들어온 남편이 회사차를 끌고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타향에서 유일하게 아는 얼굴, 두 달 만에 만난 남편은 그새 까맣게 타 있었다. 2달 만에 만난 남편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베트남 호치민이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로 와닿았다. 나의 6년간의 베트남 생활은 그렇게 얼렁뚱땅 시작되었다. 알 수 없는 내일의 호치민을 만날 생각을 하니 불안하고 설레지만, 어쨌든 오늘부터 나도 이제 호치민 마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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