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던 베트남에서는 기혼 여성을 부르는 존칭으로 ‘마담(madam)’을 사용하는데, 남편이 베트남 주재원으로 파견되면 그 배우자는 마담으로 불리는 게 일반적이다. 간혹 친밀감을 표시며 찌 어이(Chi oi, 언니)나 엠 어이(Em oi, 동생)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선을 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에 적어도 업무 관계에 있어서 그런 호칭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때론 적당한 선긋기도 필요한 법이다.
처음 마담으로 불렸을 땐 한국의 ‘마담’이 자동 연상되어 떨떠름했었지만, 어쨌든 존칭이라고 하니 익숙해져야 했다. 집을 청소하거나 요리를 해주는 메이드를 고용하고, 기사가 딸린 회사 차를 종종 타다 보니 어쩐지 사모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사노동에서 벗어나니 뜻밖에 생긴 여가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문득 다른 한국 마담들은 낮 시간에 뭘 하면서 보내는지 걸까 궁금해졌다.
요가 배워 볼래요?
아침 등교 시간이 되면 아파트 로비는 유치원이나 국제학교 스쿨버스에 아이들을 태워 보내는 한국 엄마들로 붐볐다. 그중 종종 아침인사를 주고받는 눈이 동그랗고 야무져 보이는 H가 요가 같이 해보자고 권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 때 필라테스는 잠시 경험해본 적이 있지만, 요가는 해본 적이 없었다. 주저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H는 한번 체험해보고 등록해도 된다고 했다. 둘째를 출산하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라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끼리 소규모 그룹을 만들고 외부 강사를 불러 아파트 짐(Gym)에서 요가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얼결에 요가 수업에 참석하게 되었다. 수업은 아파트 D타워 수영장 옆에 있는 작은 짐에서 진행되었다. 새로 온 수강생이라고 소개하고, 어색함에 쭈뼛거리며 첫 수업에 참여했다. 인도 국적의 요가 선생님은 조근조근한 말투로 차분하게 동작을 가르쳐주는 주셨는데, 첫 수업이라 긴장해서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눈치껏 다른 수강생 자세를 따라 앉았다 일어났다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땀도 한 바가지는 흘린 것 같았다. 학창 시절부터 몸은 유연한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요가는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새로운 학생은 유연하면서도 강해 보인 다고 했다. 긍정적인 평가에 힘입어 정식으로 요가 수업을 등록했다. 처음 이틀은 근육통에 시달렸고, 다음 수업에 가기 싫어졌지만, 막상 수업에 들어가면 근육들이 풀리면서 시원한 쾌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 이래서 요가를 하는구나. 그렇게 나의 호치민 마담으로서의 처음은 요가로 시작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수강생들과 커피를 배달시켜 수영장 벤치에 앉아서 마시면서 베트남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덤이었다.
요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H가 부산하게 카카오톡으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천 톡방으로 쇠고기를 주문했다고 하며, 천 톡방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었다. 천 톡방은 한인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단톡방이었는데, 카카오톡 단톡방 인원 제한인 1,000명까지만 입장할 수 있었다(현재는 천명 제한이 풀려서 삼천 톡이 되었다). 고기방, 해산물 방, 과일 방, 중고물품 거래 방 등 주제별로 여러 개의 천 톡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H는 아직 여유가 있는 단톡방 몇 개에 나를 초대해주었다. 호치민 생활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품질 좋은 물건들은 삽시간에 주문 마감이 되었다. 왜 다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안 놓는지 이해가 되었다. 특히 괜찮다고 소문난 전집이나 장난감들은 중고거래 방에 올라오자마자 판매 완료되었다.
어느 날 천 톡방에서 피트니스 회원권을 승계하겠다는 톡을 발견했다. 승계는 사용 기간이 남은 회원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말하는데, 5개월에 300만 동이면 한 달에 60만 동(3만 원 상당)인 셈이니 괜찮아 보였다. 게시물을 올린 사람에게 연락하고 피트니스 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피트니스 센터로 발을 들인 나는 줌바(Zumba)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고 정신없이 강사를 따라 움직이다 보면 1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한국인 수강생들이 꽤 되어서 간혹 한국 가요에 맞춘 안무가 나오면 더 신이 나서 움직였고, 몇 달을 다니다 보니 반복되는 고정 안무들은 외우게 되었다. 그렇게 화, 목은 줌바, 월수금은 요가로 나만의 시간표를 만들어서 열심히 몸을 움직였고, 그 덕에 체중도 감량할 수 있었다. 그러다 몸보다 마음이 앞선 탓이었을까. 평소보다 흥에 겨워 몸을 움직이며 발을 내딛는 순간 찌릿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무릎 부상으로 운동을 쉬게 되었다. 알고 보니 줌바를 하다가 무릎이 다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했다. 결국 운동의 즐거움을 무릎관절 반달연골과 바꾸게 되었다.
무릎 연골과 바꾼 흥이 넘치는 줌바 수업
베트남어 할 줄 아세요? Chi co noi tieng Viet khong?
베트남에 오면 누구나 한 번은 베트남어 배우기에 도전한다. 시장에서 가격 흥정을 하거나, 길을 물을 때, 청소 메이드에게 일을 시킬 때에도 베트남어는 필요했다. 베트남어를 배우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1대 1 과외, 그룹 과외, 베트남어 어학원 등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래도 개인과외가 유리한데, 1대 1로 발음과 성조를 교정하며 배울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몹시 반복적이며 지루하다는 점이다. 개인과외로 성조와 발음, 기초 회화를 익히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베트남어 어학원이나 그룹 과외를 통해 배우게 된다. 수업에 참여하고 같이 베트남어를 따라 하다 보면 혼자 할 때보다는 훨씬 덜 지루하다. 물론 수업 끝나고 수강생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도 하는 시간은 덤이다.
중국어는 4 성조라지만, 베트남어는 6 성조인 데다 기껏 베트남어를 배워서 말하더라도 베트남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외국인이 하는 발음을 적당히 알아듣는 척이라도 할 만 하지만, 일부러 안 듣는 건가 싶을 정도로 못 알아듣는다. 그러다 보니 구글 번역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한국 마담들도 점점 늘고 있다. 팁이라면 한국어를 베트남어로 바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한국어-영어-베트남어 순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가 더 잘 통한다. *베트남어와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쓸 예정이다.
베트남어 수업은 보통 호치민 인사대 교재로 시작한다
그렇게 나도 골린이가 되었다.
엄마빠 따라 스크린 연습장에 따라온 골린이, 당시 4세
골린이 8세, 엄마 따라와서 공 치는 중
베트남은 한국에 비해 골프 비용이 싼 편이라, 베트남에 있을 때 골프를 배우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해서 배우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정확한 비용은 모르지만, 한국에서 필드 한번 나갈 수 있는 비용으로 베트남에서는 서너 번을 나갈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골프 투어도 많이 온다고 했다. 골프는 왠지 잘 사는 사람들이 돈 자랑하려고 하는 운동 같다고 생각했는데, 무릎 부상으로 점프가 불가능해진 나에게 남편은 골프를 추천했다. 와이프랑 같이 필드에 나가는 게 꿈이라나 뭐라나. 남편 소원 들어주는 셈 치고 집 근처 실내연습장에서 프로 골퍼 티칭 3개월 과정을 등록했다. 어깨를 맞추면 다리를 맞추라고 하고, 다리를 맞추면 허리를 돌리라고 하고, 팔 굽히는 각도도 정해져 있고... 골프는 생각보다 정교한 운동이었다. 하나만 틀어져도 공이 맞는 소리가 달라졌다. 그냥 공만 때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공을 정확히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공이 잘 맞아서 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면 쾌감이 있었다. 실내 연습장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는 야외 연습장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프로골퍼에게 10회 수업을 듣게 되었다. 하체가 튼튼해서 골프 하기에 맞춤이라고 하셨지만, 타고난 것보다는 꾸준함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연습장에 가서 공을 200개씩 쳤다.
그리고 드디어 남편과 필드로 나가게 되었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공을 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캐디의 응원까지 받아가며 쳤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아이들 하교 픽업 시간에 맞춰, 두 홀 정도를 남겨놓고 부랴부랴 돌아왔다. 힘들었지만, 내가 친 공이 높이 날아가서 떨어지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다들 필드에 나가서 잔디 좀 패보라고 하는 거였구나 깨달았다. 나는 또 그렇게 골린이가 되었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연습장도 폐쇄되고, 필드에도 못 갔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골프는 배워보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남편은 골프를 배우라고 성화다. 여전히 나는 골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