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언 Jan 28. 2022

뗏(Tet, 베트남 설) 사용 설명서

어쩌다 호치민 마담 #5

뗏(Tet, 음력설)은 베트남에서도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자 긴 연휴다. 베트남 공휴일은 한국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인데 뗏(Tet), 흥붕 왕 제사(Giỗ tổ Hung Vương), 노동절, 독립기념일 정도가 달력 속 빨간 날이다. 뗏은 일 년 중 가장 긴 연휴로, 짧게는 1주일(영업일 기준 5일)에서 길게는 2주에 걸쳐 나라 전체가 새해를 맞이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뗏 기간에는 고향으로 모여드는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데, 한국과 다른 점은 많은 이들이 오토바이로 타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고향을 향하는 오토바이 대장정 덕분에 뗏 기간 동안 호치민의 오토바이 수는 확연하게 줄어든다. 버스도 운행하지 않고, 운행하는 택시 수도 현저히 줄어들어, 마치 호치민이란 거대한 도시의 시계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현지인들이 고향으로 떠난 뒤 고요해진 호치민에서 이방인들은 설을 어떻게 보냈을까. 베트남에서 6년을 머무르는 동안, 낯설기만 했던 멈춰 선 도시를 조금은 즐길 수가 있게 되었다.






쭉 믕 남 머이!(Chuc Mung Nam Moi, Happy New Year)

뗏을 앞둔 호치민은 봄과 새해를 맞이하는 노란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호치민 어디를 가도 노란 꽃 장식이나 노란 꽃 봉오리가 맺힌 꽃나무를 볼 수 있었다. 오토바이들도 노란 열매가 달린 금귤 나무를 여기저기 배달하느라 바쁘다. 뗏을 앞두고 집을 장식하고, 선물하기 위한 꽃들을 사느라 공원에는 분홍빛 꽃과 노란 꽃, 금귤 나무 화분들이 가득한 꽃시장이 열린다. 과히 뗏 장식 3 대장이라 할 수 있겠다.  


 호아 마이(Hoa Mai, 매화)라고 부르는 노란 꽃은 베트남 남부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 중 하나다. 다섯 개의 꽃잎은 각각 장수, 부, 평화, 건강 및 덕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한편, 노란색은 행복, 번영, 행운을 상징한다고 한다. 호치민에서 호아 마이는 봄의 상징, 그 자체였다. 반면 북부에서는 분홍빛 호아다오(Hoa Dao, 복숭아꽃) 봄의 상징으로 여긴다. 분홍빛 복숭아나무가 가장 일찍 잎보다도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인데, 전통적으로 복숭아꽃은 가족을 평화롭고 건강하게 유지한다고 여겨졌다.

금귤 나무(CÂY QUAT) 또한 뗏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금귤은 가업에 건강과 행운을 가져다주는데, 나무에 열매가 많을수록 가족의 운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금귤 나무의 모든 부분이 의미가 있는데 과일은 조부모, 꽃은 부모, 새싹은 어린이, 새로운 녹색 잎은 손자를 나타낸다고 한다.


뗏 장식 3대장 - 호아마이, 호아다오, 금귤나무 photo by me

     

뗏에는 사진 찍으러 갑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피하기 일쑤였던 나지만, 베트남에서는 포기했다. 그들과 친해지려면 사진을 같이 찍고, 추억을 기록으로 남겨야만 했다. 기념 촬영은 필수요, 똑같은 포즈는 선택이었다. 다만 날씬하고 젊은 베트남 엄마들과 한 앵글에 담기기엔 내가 추레하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같이 웃고 있는 사진이라 기분은 좋다. 그들 덕분에 아이들 사진만 가득했던 내 사진 폴더에도 내 사진이 꽤 많이 채워졌다. 역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


꽃시장 구경 안 갈래? 사진 찍으러 가자


오늘도 베트남인 친구 D에게서 연락이 왔다. 뗏에 펼쳐진다는 꽃시장에서 대해선 익히 소문을 들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나는 당연히 오케이를 외쳤다. 다이아몬드 플라자 뒤편 카페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나갔더니, 아오자이를 차려입는 베트남 친구와 외국인 친구들이 나와 있었다. 다이아몬드 플라자 뒤편엔 호치민 청년문화센터(NhaVan Hoa Thanh Nhien TP.HCM)는 뗏이 되면 각종 꽃장식과 전통 소품으로 광장을 장식해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를 제공한다. 베트남하면 떠오르는 꽃 묘목을 가득 실은 나룻배가 떠다니는 강변은 아니었지만, 노란 꽃들과 전통적인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광장과 사진을 찍느라 광장을 가득 메운 풍경은 그대로 장관이었다.      

호찌민 청년문화센터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photo @thiennhien.vn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뗏 기념 촬영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인민정부청사 앞 호치민 광장(Đường hoa Nguyễn Huệ)과 호치민청년문화센터(Nha Van Hoa Thanh Nhien TP.HCM),  9.23 공원(Cong Vien 23 Thang 9)은 잘 알려진 포토 스폿이었다. 특히 차 없는 거리로 조성된 호치민 광장의 뗏 장식은 매년 봐도 놀랍기만 하다. 지붕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고, 거대한 조각상을 세우고, 광장을 꽃으로 가득 채운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우리 가족들도 이때만큼은 호치민 광장으로 나가본다. 물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 시간을 최대한 피해서 갔다.

청년문화회관 앞에서 기념촬영(2020) photo by me
9.23 공원에서 첫 기념촬영(2019) photo by me


뗏에는 여행을 떠나요

베트남 사람들이 고향으로 향하기 때문에 식당도 마트도 시장도 문을 닫는다. 일을 도와주는 메이드도, 운전기사도 이때만큼은 고향으로 떠난다. 대중교통도 여의치 않아서 뗏 기간엔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호치민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긴 연휴기간 동안 음력설을 쇠지 않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우리 가족도 뗏에는 해외여행, 여름방학엔 한국 귀국, 가을엔 베트남 국내여행으로 방향을 잡아 놓아서, 뗏 기간에 더 저렴하게 다녀오기 위해 수개월 전에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해왔다. 태국(방콕/파타야/치앙마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 조호바루), 인도네시아(발리) 등은 비용도 저렴한 편이고 이동시간도 짧아 뗏 기간에 선호하는 여행지이다. 호주나 유럽을 향하는 가족들도 간혹 있었지만, 미취학 아동들을 데리고 장거리로 여행하는 것은 아직은 무리라는 생각에 가까운 나라 위주로 움직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 뗏에는 태국을 다녀왔다. 방콕에서 1박 후 치앙마이에서 4박 5일을 보냈다. 숙소에서 중심가까지는 거리가 있었는데 우리는 매번 걸어서 갔다. 매년 설에는 하루 만보를 넘기게 되는 기록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두 번째 여행은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는 여행 다니기에 좋은 도시였다. 관광 국가답게 체류기간에 맞춰 적당한 관광 패키지를 끊으면 여행기간 내내 활용할 수 있었다. 기회가 닿으면 또 가보고 싶다. 세 번째 여행은 치앙마이를 가느라 잠시 스쳐갔던 방콕이었다. 중심가에 호텔을 잡고, 사원, 수상시장, 기찻길 시장, 동물원, 크루즈 디너 등 유명한 곳들을 위주로 돌아다녔다. 네 번째 여행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였다. 가장 많은 한국 사람을 만났고, 가장 많은 닭고기를 먹었던 곳이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다니, 돼지고기 때문에 슬퍼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섯 번째 코로나 때문에 국내선 비행기도 타는 게 무서워져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호치민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붕따우로 다녀왔다.

2017년 싱가포르
2016년 치앙마이

사실 우리 가족의 여행은 어느 나라를 가든 아이들을 위한 동물원, 놀이공원, 아쿠아리움 위주였다. 오죽하면 중국인 친구가 전 세계에 있는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을 다니면서 동물원 지도를 만들어보라며 놀렸을까. (잠깐 솔깃하기도 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른들을 위한 장소와 맛집들도 하나둘씩 코스에 포함되었다. 이제 좀 다닐만하겠다 생각할 즈음 코로나가 찾아왔다. 당분간 뗏 여행은 쉬기로 결정했다.  



뗏 생존 지침: 무조건 버티자


뗏을 쇠러 사람들이 떠난 호치민은 일 년 중 공기가 가장 쾌청하다. 에어비주얼(AirVisual, 대기오염 측정 어플)도 이때만큼은 초록색(좋음)이다. 뗏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일본 친구 M에게 뗏 동안 뭘 했냐고 물어봤더니


“호치민에 있었어요. 아파트 앞 12차선 도로가 텅텅 비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너무 신나요!”


라고 대답했다. 아파트가 대로변에 있어 늘 소음에 시달렸던 이웃들은 뗏 기간 동안 모처럼의 고요와 평화를 즐겼다. 물론 2주를 버티기 위한 사재기는 필수였지만 말이다. 다행히 한국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뗏 기간에도 문을 여는 상점이나 식당이 많이 늘었다. 고향으로 가지 않고 뗏 기간 동안 그랩 카를 운전하면서 돈을 버는 이들도 꽤 많아져서 약간의 할증요금을 감안하면 시내를 나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뗏 연휴가 끝나고 새롭게 업무를 시작할 즈음이면 사자춤을 볼 수 있다. 건물 입구에서 귓전을 울리는 타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에 맞춰 사자들이 춤을 추고 재주를 부리다 멈추면 리 씨(Li xi, 복돈)를 직접 사자에게 준다. 베트남 사람들은 정성껏 빨간 봉투에 넣어서 사자에게 주었지만, 우리는 외국인이니까 아이들이 20만 동짜리 팔랑거리는 지폐를 들고 가서 준다. 애들은 마냥 신납니다. 


사자에게 리씨를 주는 아들2호 photo by me

그렇게 버티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올해는 귀국해서 한국에서 설을 보내고 있지만, 오미크론 코로나 확산세로 집콕하기로 결정했다. 어서 일상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록 아보카도의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