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살자 무화과나무’가 궁금했다. 열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나무는 숲 바닥이 아닌 공중에서부터 생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 나무의 무화과 열매를 먹은 새나 원숭이들이 배설한 씨앗이 다른 나무의 약한 틈에 자리를 잡아 싹을 틔운다. 위로는 숙주 몫의 햇빛을 가로채고 아래로는 숙주의 줄기를 타고 내려가 바닥에 뿌리를 내린다. 이어 숙주의 줄기들을 압박해 양분을 빼앗으며 이내 숙주는 속이 텅 빈 채로 죽고 말지만, 기생수는 그 덕에 스스로 서있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울창한 본체가 되어 열대 우림 생태의 핵심이 된다고 한다.
요나는 교살자 무화과나무 앞에서 일종의 숭고한 공포 체험을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처한 현실의 본질을 깨달았다는 데서 오는 공포, 애써 인정하기 싫었던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공포를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삶은 정글이야’라는 듯 노골적인 회사명 ‘정글’. 재난을 재난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하게 만듦으로써 소비재로 가득한 것이 세상 이치라는 기획력.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못 본 체 눈 감아야 하는 처세. 그 안에서 요나는 현실 법칙이라는 교살자에게 서서히 목을 조이고 자신은 속이 비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왔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라는 사실 앞에서 목 졸리는 듯 한 공포를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문명이란 어둡게 보자면 하나의 교살 체계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무리 타당한 역사와 처절한 가치 전쟁으로 쌓아 올린 유구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쌓아 올려진 무언가, 어딘가에 우리는 선택의 기회조차 없이 던져지듯 발을 들였다. 이내 이 체계에 편입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고, 편입의 대가로 무엇을 내어줬는지는 끊임없는 질문이 되겠지만 이런 편입 과정을 통해 문명이라는 울창한 숲 아래에 보호 받게 되지만, 대신 그 체계, 체제에 양분을 공급하며 속은 텅 비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 우리의 흔한 착각은 문명을 ‘자연현상’으로 보는 데 있다고 이야기했다. 지난한 교살의 과정을 거치며 아니 아직 그 과정 속에 있으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 법, 도덕, 체계를 마치 하나의 자연현상처럼 인식하고 살도록 하는 것이 이 교살체계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이 교살체계에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 요나가 길을 잃는 방식에 주목해 본다. 소지품을 모두 잃는 상황, 제한 구역에 발을 들여 놓는 상황, 금지된 이에게 말을 거는 상황, 이런 것들이 요나를 교살의 과정에서 한발 물러나게 했으며 교살의 실체를 보게 했고 비록 그 손아귀에서 놓여지지는 못했으나 길을 잃음으로 길을 찾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행위들은 낮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아니며 권장되는 행동들이 아니기에 밤을 여행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작가는 밤의 여행자가 되기를 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