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뭘까
언제였더라. 그때의 남자친구랑 점심 식사를 하러 가서 후식으로 새콤하게 마리네이드한 토마토를 주문했다.
언제든 토마토를 보면 '멋쟁이 토마토'를 흥얼거리게 된다. 나는 얼마 전까지 토마토가 김치가 되고 싶은 줄 알았다.
나는야, 케첩 될 거야.
나는야, 김치 될 거야.
나는야, 춤을 출거야.
뽐내는 토마토.
케첩도 되고 김치도 되고 춤도 추다니,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토마토들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토마토라면 춤추는 토마토가 되기에는 좀 머쓱하다. 하지만 김치 정도라면야 뭐 토마토 김치, 그럴 수 있지 싶은데 너무 파격적이지도 않고 적당히 특별해서 할만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가사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 뿐이고 원래 가사는 케첩이랑 김치가 아니라 주스랑 케첩이라는 걸 알고 좀 김이 샜다. 주스가 되고 케첩이 되는 평범한 토마토들 사이에 딱 하나, 춤추는 멋진 토마토가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마트의 진열대 같은 곳에서 만난다면 새빨간 토마토는 춤을 추지 않아도 눈길을 끈다.
뮤지컬 헤드윅의 클라이맥스에는 두 개의 토마토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헤드윅은 여자가 되어 결혼을 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지만 수술의 실패로 여자도 남자도 아닌 몸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결혼하려던 남자에게 버림받고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반쪽을 찾아 내내 헤매게 된다. 그녀는 긴 극의 마지막에야 그 상처를 위로받고 여자의 가슴을 대신해 속옷 속에 넣어두었던 토마토를 꺼내 으깨어버린다.
사랑을 갈망하는 한편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헤드윅 그 자체였던 토마토. 그것을 내던지고 여자의 옷도 벗어던지고 헤드윅은 빛이 새어 나오는 틈새로 홀연히 사라진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제 자유롭고 다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리라.
어떠한 상징, 또는 그 자체의 토마토.
토마토를 보면 존재 본연을 고민한다. 케첩인지 주스인지 아니면 춤을 추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니면 혼자서도 괜찮은지.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 정의하지 못하듯 고민한다.
헤드윅의 토마토까지 들은 남자친구가 말했다.
'토마토를 보고 그런 생각까지 하는구나.'
나와 그는 그야말로 감성과 이성의 극단이다. 토마토를 보면 헤드윅의 삶까지 생각하고 마는 사람과 그냥 토마토를 먹는 사람.
우리가 토마토였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겠지. 내가 김치 될 때 그는 분명 주스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라서 만났고 전혀 달라도 재미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가도 너의 어떤 부분은 이렇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