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67.5
병원에서 떼는 서류에 적히는 내 병의 코드다. 이 몇 개의 글자를 얻어내는데 10년이 걸렸다.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중학교 때였다. 간혹 눈이 보이지 않거나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일이 생겼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아니라 뿌옇게 흐려졌다. 머리가 멍해지고 앞에 뭐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물건인지 사람인지, 가만히 있는 건지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었다.
팔을 들어 올리려고 하면 내 의도와 달리 무겁게 움직여졌고 어느 순간 힘이 탁 풀리면서 아래로 뚝 떨어져 버렸다. 다리도 마찬가지라 무릎에 힘이 빠져 툭툭 꺾이면서 넘어질 듯 불안해졌다.
앞도 보이지 않고 걸을 수도 없다. 한 번은 사람이 빽빽한 학교 복도에서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걸어서 교실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눈앞에 있는 사람도 분간하지 못하고 아무한테나 막 부딪혀서 포기하고 가까운 벽에 기대서 가만히 서있었다. 걸어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갈 수 없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감각과 함께 사고가 멈춰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와 혼란스러움이었다.
익숙해질 정도로 여러 번 그런 일을 겪고서야 이런 증상에 원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항상 음악 시간에 피리를 불거나, 뜨겁고 매운 음식을 후후 불면서 먹고 난 뒤였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근처 도서관에 갔다가 매점에서 별 생각 없이 뜨거운 라면을 먹었다. 그릇을 반납하고 나니 앞도 잘 보이지 않고 머릿속까지 흐리멍텅해져서 간신히 집은 스테인리스 컵에다가 컵라면에 붓는 끓는 물을 받았다. 뜨거운 물이 닿자마자 놀라서 그대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쇠로 된 컵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쨍 소리가 커다랗게 나는 바람에 누가 봤을까 봐 민망한데 떨어진 컵이 어디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아 줍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도망쳐버렸다.
당연히 병원에 갔다. 정형외과도 가고 신경외과도 가고 동네에 하나 있는 큰 종합병원에도 갔다. 하지만 피리나 뜨거운 라면 같은 이야기는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고, 호흡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해봐도 답을 주는 의사는 없었다.
지금 멀쩡히 걷는데 무슨 마비가 온다는 거냐고 말하는 의사도 있었고 그런 증상이 있을 리가 없다고 면박을 주는 의사도 있었다. 이미 모든 증상을 설명했는데 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거냐고 다시 추궁받기도 했다.
근처에서 잘 본다는 병원은 모두 다녀온 것 같았다. 겨우 중학생이었고 겪어본 적 없는 실패라 지치기에 충분했다.
의사라면 조금 더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내고 그러면 치료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병원에만 가면 당연히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해결책이 없다면 일단 피하기만이라도 하기로 했다. 음악 시간에 피리를 불지 않으면 되고 집 밖에서는 뜨겁거나 매운 음식을 먹지 않으면 된다. 라면이 먹고 싶어도 김밥을 주문하는 것. 적어도 그 정도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뒤로 접어두고 한 숨 자고 일어나면 해결되는 일도 있지만 영영 사라지지 않을 듯한 문제들도 있다. 그래도 어쨌든 이 나간 그릇처럼 미묘하게 흠이 나서 고쳐지지 않는 문제를 그럭저럭 안고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