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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닝 Dec 04. 2021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을 고민하는 사람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대학교는 나에게 편한 공간이었다. 만남을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 일부러 무리에 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내가 듣고 싶은 강의 편하게 듣고,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면 한 끼 떼울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있었다. 그래서 졸업하고 난 후 꾸준히 연락하는 친구들이나 그룹이 많지는 않은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편히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나에게 너무 소중하다.


우리는 현사광(aka 현대사회와 광고) 수업에서 만났다. 당시 조별 과제가 있었는데 우린 같은 과여서 자연스레 같은 조가 됐다. 크리에이티브하고 창의력이 넘치는 친구 A, 항상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고 나완 다르게 문학과 철학에 강했던 친구 B, 그리고 나는 이 친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취향과 지식들이 좋았고 부러웠다. 그래서 더 따라다니고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08학번이던 우리는 '스펙'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던 때에 학교를 다녔다. 국문과였기 때문에 복수전공이나 전과를 하는 동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에도 스펙은 자연스레 빠질 수 없는 주제 중 하나였다. 물론 복전이 자유로웠던 학교여서 복수전공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경영학과나 뭐 그런 '취업'을 위한 것들은 아니었다. 각자가 배우고 싶은 걸 더 배우고 싶었던 마음, 뭐 이런 거였던 것 같다. 미래가 불안하긴 한데 또 우리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도 너무 좋았다. 남들이 스펙 쌓을 때 우린 다른 걸 해보자! 꼭 돈을 버는 것 말고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해도 쓸모있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쓸모그라피'라는 걸 만들었다. 명사 '쓸모'와 목록을 나타내는 '-그라피(-graphy)' 라는 접미사를 붙인 나름의 의미가 있는 말이다.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라는 취지였다. 시장에서는 스펙도 안 되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그것들도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을 것이다. 라는 우리의 신념이나 주장이 박힌 네이밍이었다. 그 후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 여러가지를 많이 했던 것은 같은데 기억은 잘 안 난다. 어디에 아카이빙이라도 해놓을 걸.. 하지만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만든 그룹의 지향점은 기억 한 켠에 박혀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인생의 방향이 한 차례 흔들리면서 회사는 절대 안 다닐 거라며 주장했던 나는, 개중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틈바구니를 발견하고 IT산업에서의 직장인이 됐다. 하는 일이 이런 거다 보니 가치와 의미보다는 '무엇을 해야할지'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 됐다. 목표는 현실적으로 세팅하게 됐고, 비즈니스는 뭐고 숫자는 어떻고.. 이런 것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치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에게 더 요구되는 역량은 그 때 우리가 '쓸모 없음'이라고 외쳤던 것들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웃기게도 쓸모그라피의 가치를 졸업하고도 10년이 지나가는 지금 알게 된 셈..ㅎㅎ 좋아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고, 사회 문제로 생각을 나누고 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에 중요한 자산이 되는 시기가 오더라. 왜 인문학이 사회의 근간이라고 하는지도 오히려 일을 하며 깨달았다. 철학과 방향이 없는 기술은, 그저 기술에 그칠 뿐이라는 것도.


또 하나 느낀 건 돈과 비즈니스와는 다소 멀어보이는, 어쩌면 쓸모 없어 보이는 것들에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더라. 현실과는 동떨어진(것처럼 보이지만) 큰 방향을 보며 꿈을 꾸는 사람들. 의미있는 일을 위해 달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성공하고 인정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니, '쓸모 없음'으로 보이는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더욱 자기의 취향을 드러내고 결이 맞는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퍼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취향과 가치를, 의미를 더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수에게는 쓸모없어 보여도 나에겐 가치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실천하고 드러내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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