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독립운동물 || 장편소설『 별이 그리 정했다 』
어쨌거나 갈피는 잡혔다. 갈팡질팡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질 바에는 아무 나무 밑에서 널브러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윤새를 경식이 붙잡은 것이다. 경식은 윤새가 사진관에서 일하기 훨씬 전부터 장사를 하고 있었다던 광명 안경원의 주인장이었다. 사진관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전, 등은커녕 발 붙일 곳도 없이 돌아다녀 비쩍 마른 열일곱의 윤새에게 처음으로 대가 없이 따뜻한 점심을 챙겨 준 뒤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안부 인사를 시켰던 애매하게 권위적인 자.
마주보고 점심을 먹은 뒤로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경식은 윤새를 그저 지나치지 못했다. 어떤 날은 사진관의 상황을 물어보는가 하면 다른 날은 챙겨 줄 것도 아니면서 윤새의 상황을 덤으로 물어보았다. 윤새는 그가 이제는 한물 지난 인심이라는 것에 여즉 낭만을 품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왜, 나이 든 사람들은 살면서 믿어온 가치를 쉽게 져버리지 못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 그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그런 알량한 관습이나 습관쯤은 짓밟아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타인을 일으켜 세워 주면 뒤에서 누군가 총부리를 들이밀 것이고 내가 일으켜 세운 타인은 나를 돕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아주 당연해진 세상이다. 그러니 넘어지지 않을 수밖에. 인사만 하고 용돈 한 푼 쥐어주지 않는 경식이었지만 윤새는 죽어가고 있을 때 밥풀 한 톨이라도 던져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요구에 응했다. 잘 살고 있어요. 사진관은 좀 어렵고요. 손님은 평소랑 같죠, 뭐. 둘 중 하나예요. 낭만 챙기는 사람들이나 욕심 많은 부자들이 와요. 윤새는 경식이 안부를 물을 때마다 대강 이런 내용의 문장들을 순서만 바꾸어 말했다. 그러나 경식은 그런 노골적인 무성의를 눈치 채지 못하고 늘 고개를 끄덕였다.
윤새는 뒤에서 누군가가 밀고 있는 것처럼 비척비척 뒷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광장으로 나가서 손에 쥐어보지 못할 각양각색의 색빙수를 마주하는 것보다는 처량하게 사람이 없는 뒷골목을 기어다니는 것이 나았다. 품속의 돈은 방을 구할 때 써야 하니 지금 당장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덜 힘겨웠다. 눈 딱 감고 사진관으로 돌아가 볼까 하는 충동도 들었지만 다시 쫓겨나는 수고스러움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경성의 뒷골목에서는 그늘이 될 만한 커다란 나무조차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밝고 푸르스름한 하늘에 하얗게 피어오르는 달이 보였다. 모두가 떠나갈 때도 진득하게 윤새를 따라온 진득하고 힘없는 존재. 윤새는 몇천 년 전부터 이 땅을 바라보고 있었을 그 존재가 갑자기 말이라도 시킬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사 안 하냐?”
뒤에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윤새는 낮게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뿔테안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보통날의 경식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놈의 인사 저는 언제쯤 받는답니까.”
“예끼, 어른은 근육이 굳어서 고개를 못 숙인대도.”
“손님한테는 잘만 숙이시던데.”
경식은 윤새의 말을 무시했다.
“어떻게 지내냐.”
“잘 살고 있어요. 사.......”
물 흐르듯 나오려던 다음 문장에서 윤새의 혀가 멈추었다. 새로운 문장의 조합을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경식이 대신 문장을 끝맺었다.
“사진관에서 쫓겨났다고 들었는데.”
“그런 게 이 거리까지도 소문이 나나요. 예, 쫓겨났습니다. 요즘 일본 상인들이 판을 쳐서 상점에 파리만 날린다더니, 사람들 참 할 짓도 없나 봅니다.”
“일자리 잃은 윤새 너만 하겠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설명이나 해 봐라. 사진관이 장사 접는 건 아닐 테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암막실을 뒤집어엎고 도망갔습니다. 저는 그걸 못 잡았고요. 안 그래도 경영난이었던 사진관 인력이라도 줄여보려고 이참에 쫓아낸 거겠죠.”
“뒤집어엎은 이유는 알고?”
“모릅니다. 그 사람이랑 4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답답할 때는 몇 번 있었지만 이런 파격적인 방식으로 사직할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합니까. 내 사진관 아니니까 상관도 없고, 더 생각해 봤자 화만 나고. 생각 안 하렵니다.”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나한테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셈이냐?”
“뭐, 딸마냥 살갑게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그 자리는 우진이가 채갔으니 너는 들어오면 알아서 공석 찾아봐라.”
윤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이런 부류의 대화기법을 아주 싫어했다. 당황스러운 반응이 나오게끔 수수께끼를 던져 놓고 알아서 답을 찾아보라는 방식의 대화가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잠시 고민했던 건 10초 뒤의 미래를 보아서였을까. 퍼드득 놀라며 ‘들어오라뇨?!’ 하고 외칠 것인가, 황송한 표정으로 ‘들어...... 오라뇨?’ 라고 말할 것인가.
윤새는 작별을 택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서 다시 비척거리며 얼마 못 갈 걸음을 떼었다. 정확히 10초 뒤 경식이 다급하게 외쳤다.
“윤새야, 안경점에서 일해라!”
하고 싶은 일로 벌어먹고 사는 게 어디 쉽겠는가. 그러나 윤새는 안경원 앞에서 진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로 벌어먹고 사는 건 쉽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보기 싫은 얼굴을 보며 먹고 사는 건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진운이 평온한 얼굴로 진열대에 각양각색의 안경집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윤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시뻘겋게 물드는 것을 보며 안경집 안에 담을 안경알을 닦는 투철한 직업 정신까지 보였다. 윤새는 진운과 경식 중 누구의 멱살을 먼저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어 어지러웠다. 그의 고민을 읽은 듯 경식이 다급히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김진운, 들어가 있으랬잖아. 지금 둘이 서로 봐서 좋을 게 뭐 있어?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고 인사시킨대도.”
“우리는 살갑게 자기소개라도 하고 모였답니까. 여기가 애들 다니는 학교도 아니고.”
“저 사람 눈에 다른 동지들 목숨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좀 살가워지고 싶을 것 같냐?”
“예,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은.”
의외로 쉽게 나온 대답에 경식은 조금 놀란 듯했다. 진운은 식어버린 곰탕 같은 눈을 하고 윤새를 쳐다봤다. 윤새는 뜨뜻해진 동치미 국물 같은 눈으로 시선을 되받아쳤다.
“김진운입니다.”
“모르는 걸 알려 줘야지, 이놈아. 너랑 9년을 일했는데 설마 그걸 모르려고. 도움도 안 되니까 들어가 있어라. 아니다, 나가 있어라. 윤새가 들어와서 나랑 이야기하자.”
항변할 줄 알았던 진운이 순순히 안경점을 나가자 경식은 다시 한 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는 윤새를 손님이 상담을 받는 자리에 앉혀 놓고 진열대 뒤로 들어가 섰다. 이따금씩 사람이 지나다니는 바깥을 살피는 것으로 보아 손님과 주인장의 모양새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진운이 군소리 없이 나간 것 또한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말도 신호도 없이 일사천리로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이해한다는 건 오래도록 마음을 맞춘 사이라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새의 마음 한 구석을 어떤 감정이 거슬리게 찔렀다. 이건 문틈 사이로 가늘게 보이던, 윤새를 다른 방으로 보내 놓고 성천과 이야기하던 어떤 사람을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 사람을 볼 때 자신을 그 안에 집어넣어 보고 빠져나온 뒤 자신은 절대 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실망과 당혹이다. 끝맛이 쓴 감정이다.
“10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냐?”
“제가 여길 뛰쳐나갈 것 같습니다.”
“눈을 감고 보이는 대로 말해 봐.”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걸?”
“.......”
“아니면 네가 그 뒷골목을 기어다니고 있을 거라는 걸?”
“그것까지 알고 인사하신 줄은 몰랐는데요.”
“그렇겠지. 네가 10초 뒤를 볼 수 있는 거지,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경식이 진열대 밑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쿵 닫히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 것 같았다. 윤새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경식의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진열대 위에 약과를 툭 올려놓았다.
“단 걸 먹어야 대화가 잘 풀리거든.”
윤새는 대답하지 않고 약과를 한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삼키기 전까지 영양가 있는 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일어나 다시 골목을 기어다닐 작정이었다.
“네가 미래를 본다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니까 잘 들어.”
경식이 운을 떼었다.
“네가 끊는 순간 이야기는 끝이다. 흐름이 중요하거든. 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어디까지 했는지 잊어먹으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럴 생각 없거든.
자아,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 별님들이 우리 세상에 아주 관심이 많다는 사실은 아나? 당연하지. 별님들의 세상은 천년만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거든. 자기들 세상이 지루하니 밑에 있는 우리들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거야. 재미난 이야기 구경하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도 각자 좋아하는 전래동화가 있듯이 별님들도 가장 좋아하는 세상이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별들이 있었지. 하나가 아니라 일곱씩이나. 너도 들어 본 별이야. 감이 잡히지? 이 땅을 북두칠성이 사랑하고 있어. 이 땅을 일곱 개의 별이 사랑하고 있다. 땅덩어리뿐 아니라 그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사랑했지. 그러니 우리가 일제에게 모든 걸 짓밟히고 빼앗길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
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심장을 내놓을 수 있냐? 나는 별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별들은 그럴 수 있었나 봐. 자기들 심장의 반을 찢어서 땅으로 내려보냈어. 그날 쏟아진 별똥별이 매우 아름다웠다지. 허무맹랑하지? 어린애 재우기 전 심심풀이 땅콩처럼 들려줄 만한 생뚱맞은 이야기를 왜 내 앞에서 떠벌리나 싶겠지. 하지만 그게 바로 네가 이 이야기의 증표야. 그 일곱 개의 조각들 중 하나가 네 심장 안에 들어있어. 네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이유야. 나머지 여섯 개의 조각에는 다른 능력이 깃들어 있었다는 건 윤새 너 정도면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지.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일이 꼬인 거다. 그 조각이 ‘나 여기 떨어지겠소’ 하고 조선 땅에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조각을 품고 태어난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단 말야. 그렇다고 능력 가진 사람을 찾겠답시고 조선팔도에 전단지를 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러니 별 수 있나, 발로 뛰어 찾아야지. 별이 내려준 운명을 믿으면서 말이야.
다행히 내 전부터 별의 조각을 가진 사람들, 그러니까 칠성을 찾는 자가 있었어. 그 사람이 온 세상 신문이란 신문이며 소문이란 소문에 사람이란 사람...... 헉, 헉. 무튼 한 마디로 조선팔도를 뒤져서 조각을 가졌으리라 추정되는 자들의 목록을 추려 놓은 덕분에 나도 수월하게 월성회를 꾸릴 수 있었지. 아, 네가 들어와 있는 곳이 월성회다. 심장에 별의 조각을 품은 자들이 모여 빼앗긴 조선을 구하는 곳. 낮에는 안경원을 하고 있지만 밤에는 작전실 겸 숙소로 쓰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섯 동지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이제 여섯이 되겠네. 너까지 합해서.”
“다 좋습니다.”
“다행이다. 그러니 너도 어서 안경원 일부터 배우자.”
“그것 빼고는 다 좋습니다.”
윤새는 끄트머리만 남은 약과를 마저 씹어 삼켰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저씨 말대로 눈만 감으면 미래가 보이는 제가 그런 이야기 하나 못 믿겠습니까. 먼저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저에게 안경원 일을 배우라는 건 광명 안경원 직원이 되라는 것뿐이 아니라 월성회 단원이 되라는 뜻이지요?”
“그렇지, 정확히 해 두는 게 좋겠지.”
“그렇다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경식은 윤새와 눈을 맞추며 물어왔다.
“이유는?”
“목숨이 소중해서요.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아저씨에게 말씀드리는 거지만, 경성에 오기 전에는 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도 고아였지만 거두어 준 어른은 있었습니다. 그 분도 아저씨와 비슷했어요. 너무 어렸을 적이라 흐릿하지만 조선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어요. 서신도 전달하셨고 가끔은 커다란 짐을 가지고 하루 정도 멀리 떠나셨다가 아무것도 없이 돌아오셨습니다.”
윤새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었다. 경식은 말을 얹지 않고 진열대 뒤에 서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새는 진중한 모습이 본래 경식일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은 산이 아니라 여기 아저씨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면 뒷일은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그 분은 저 대신 총을 맞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셨습니다.”
“네 대신이라고?”
“제가 없었다면 더 빨리 달리셨을 분이니까요.”
경식은 팔짱을 끼고 고민이 그득 담긴 숨을 뱉었다.
“다른 사람이 살려 놓은 목숨이니 아껴야 한다는 말이군. 이해하고말고. 하지만 말이다, 윤새야.”
그는 윤새의 가슴 왼편을 가리켰다.
“그 안에 뛰고 있는 건 네 심장이다.”
그날 경식은 윤새의 짧고 굵은 과거사를 듣고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월성회에 들어오라는 이야기는 일체 꺼내지 않을 테니 그저 머무르기만 하라고 말했다. 단순한 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로서는 그 칠성이라는 존재들을 최대한 시야 안에 모아두고 살피는 것이 안전할 테니까. 윤새로서는 영원히 감추어야 할 줄만 알았던 능력을 알고 있는 자가 은근히 반가웠으며 경식의 뜻에 지나치게 어긋나게 굴었을 때 그가 안겨 줄 수 있는 곤란함이 걱정스러워 군말 않고 안경원에 남기로 결정했다.
큰 문제는 없었다. 윤새는 경식에게서 장부 쓰는 방법을 배웠다. 솔직히 배울 것도 없었다. 외상은 목록에 적힌 믿을 만한 손님에게만 달아 준다. 아주 믿지 못할 거렁뱅이만 아니라면 나누어서 값을 치르는 것도 가능하다. 장부에 기입해야 할 항목은 판매한 안경이나 안경집의 종류, 가격, 그리고 지불 여부. 시력에 대한 상담이나 안경에 이상이 생겨 찾아오는 경우는 경식이나 진운이 담당했기에 문제 없었다. 하는 일 없이 봉급만 축내는 기분이 영 찝찝해진 윤새가 진열대 근처를 여러 번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명원이 다가왔다.
“언니, 안 해도 돼요.”
퍼뜩 고개를 드는 윤새에게 명원이 살갑게 웃어 보였다. 명원은 윤새가 안경원에 남기로 결정한 날 자진해서 안경원을 안내해 주겠다며 나선 아이였다. 윤새와 방을 나누어 쓰는 동거인이기도 했다. 입꼬리가 다정히 올라가면 오른쪽에만 폭 패이는 보조개가 퍽 귀여워 윤새는 조심해야지 생각하면서도 남몰래 그에게 정을 붙이고 있었다.
“저도 언니랑 같아요. 겉으로 보았을 때는 안경원 여급인데 사실상 하는 일은 없거든요. 경식 아저씨가 커서 안경원 차리고 싶은 게 아니면 안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어차피 얼굴 비추어서 좋을 거 하나 없다면서.”
명원은 윤새가 정리해 볼까 싶어 절반쯤 열어놓은 진열대를 다시 밀어 닫으며 덧붙였다. 갈색 머리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반짝였다. 윤새는 명원을 보자마자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머리색에 대해 물었었다. 그는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짖궂게 웃고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일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 일이 하고 싶으시면 손님 시력 측정은 어떠세요. 제가 언니 시력 먼저 봐 드릴까요? 재미가 꽤 쏠쏠해요.”
윤새는 자신의 오른쪽 눈에 나무 주걱을 가져다 대는 명원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었다. 그는 아쉬운 얼굴로 주걱을 벽에 박힌 못에 다시 걸어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 웬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안경원 안으로 능숙하게 총총거리며 들어왔다. 명원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제자리에 서서 눈만 끔벅이는 윤새 대신 개를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용맹이에요, 용맹이. 장터를 돌아다니는 들개인데 안경원에서 밥도 주고 목욕도 시켜 주거든요. 자, 용맹아. 새로 들어오신 분에게 인― 으우웁.”
용맹이는 낯선 윤새보다는 명원의 얼굴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명원은 자신의 얼굴을 잔뜩 핥아 놓고 다시 가게를 나가 어디론가 달려가는 용맹이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윤새는 그런 그에게 조용히 안경닦개를 내밀었다.
“야, 최명원. 윤새 누나 그만 좀 건드려. 들어온 지 이제 나흘 된 분한테 이 무슨 실례냐?”
저 멀리서 우진이 쌀 두 말이 실린 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곁에서는 나갔던 용맹이가 꼬리를 흔들며 총총 걸어오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우진의 다리를 보아 꽤나 멀리서부터 걸어온 듯했다. 윤새는 급히 안경원에서 나와 수레를 뒤에서 밀었다.
“언니는 괜찮다는데 왜 김우진 네가 난리야.”
명원은 어느새 아까의 살가운 미소는 지우고 딱딱해진 얼굴로 우진을 보고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묵직한 쌀 포대를 내리는 우진은 지나치고 윤새를 거들어 수레를 끌었다.
“괜찮기는 무슨. 혼자 신나서 이야기했으면서. 내가 용맹이한테 다 들었다.”
“용맹이가?”
용맹이는 명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좋다고 달려가 명원의 발치에서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새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고, 무겁다. 이렇게 무거운데 두 주도 못 버티고 거덜나는 게 말이 됩니까?”
“식구가 하나 더 늘었으니까 그렇지.”
명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윤새는 다소 불편해진 마음으로 갑작스럽게 텅텅 비워져 흔들리는 수레를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었다. 어쩌면 경식은 이런 상황이 닥칠 줄 알고 윤새에게 안경원에서 지내라고 권한 것일지도 몰랐다. 빚지고는 못 사는 그의 성정을 진즉에 파악한 것이다. 그를 월성회에 영입하고자 했던 경식이나 진운과는 달리 불순한 의도라고는 개미똥구멍만큼도 없이 해맑은 명원과 우진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속이 거북했다.
“최명원 쟤는 나한테만 저래요.”
우진이 툴툴거리며 용맹이를 안고 나왔다. 뒤따라나오는 명원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겠으나 정작 명원은 차가워 보일 정도로 덤덤했다. 우진이 몸을 숙여 수레 손잡이에 몸을 걸었다. 걸어왔던 방향으로 다시 질질 끌려가는 수레를 윤새가 급히 뒤에서 밀었다.
“또 어디 가야 해?”
“수레 돌려주러요. 혼자서 갈 수 있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같이 가자. 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마음 불편해.”
앞에서 굴러가는 수레를 보며 윤새는 사진관에서 쫓겨난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이렇게 티없이 맑았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과 함께 무언가 끌어가고 있었다. 더위는 지금보다 훨씬 심했지만.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묵묵히 걸어가는 우진은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윤새는 이참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여기 사람들도 다 내 능력을 알고 있지?”
우진의 어깨가 움찔 올라갔다 금방 내려갔다.
“네.”
“내가 월성회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네.”
“아저씨, 그러니까 사장님이랑은 얼마나 알고 지냈어?”
“글쎄요, 이제 3년 되었나.......”
“너는 바로 가입한다고 했겠구나.”
“네.......”
“이렇게 넙죽넙죽 다 대답해도 괜찮은 거야?”
“사장님께서 누나한테는 숨기지 말고 대답하고 싶은 만큼 대답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야 더 빨리 가까워지고 정 붙인대요.”
사장님도 그 말만큼은 하지 마라고 하셨을 것 같은데. 윤새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떡 삼켰다.
“너무 속 보인다.”
“왜요, 나쁜 마음은 아니니까 괜찮잖아요. 저도 식구 늘어서 좋은데. 누나 오기 전까지는 제가 막내였거든요. 누나 절대 나가면 안 돼요.”
우진이 뒤를 돌아보고 이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윤새는 달리 해 줄 말이 없어 하늘을 보는 척 시선을 피했다. 둘은 장터의 끝에 닿을 때까지 말없이 수레를 끌었다. 누군가 크게 외치는 소리에 땅만 보고 걷던 윤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우진아! 아이고야, 고생했다.”
“아주머니,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거기 서 계세요.”
마음이 급해진 듯 빨라진 우진의 걸음에 윤새도 덩달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억척스러운 인상의 여자가 주먹에 한가득 무언가를 쥐고 서 있었다. 옷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었고 손은 마디가 불거져 투박했지만 머리만큼은 윤기가 흐르고 반질반질했다. 밑으로 동그랗게 묶어서 머리가 똑 떨어지는 단발인지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장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찌 되었든 한 마주치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의 여자가 동그랗게 주먹을 쥔 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둥그런 얼굴에 활짝 핀 미소는 둘이 가까워질수록 커다란 반달 모양이 되었다. 윤새는 어쩐지 속이 더부룩해져 우진의 등 뒤로 은근슬쩍 얼굴을 숨겼다.
“이거 남겨놓은 약과다. 명원이랑 영원이랑 나누어 먹어, 혼자 다 먹지 말고.”
허구한 날 진열대에서 나오던 약과의 출처가 드디어 밝혀졌다. 뒤에 서서 묵묵히 바라만 보는 윤새와 여자의 시선이 맞닿았다.
“이건 못 보던 얼굴인데?”
“안경원 신참 누나예요. 저 이제 막내 아니에요.”
“네 나이가 제일 어린데 그래도 막내지, 이놈아. 이제 열여덟인 놈이 무슨.”
“아, 아니에요. 우리 안경원은 나이 순서가 아니라 들어온 순서라고요.”
우진은 잔뜩 억울한 얼굴로 여자가 손에 쑤셔넣는 약과를 받아들었다. 그는 뒤에 서 있는 윤새를 보며 ‘정희, 고정희 선생님’이라고 작게 다급히 속삭였다. 윤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는 손에 약과나 꼭 쥐고 있어.”
정희가 윤태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쪽은 몇 살이에요? 그쪽이란 말이 조금 딱딱해도 이해해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아가씨 아가씨거리는 건 조금 그렇잖아.”
“저는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 나는 젊었을 적에 모르는 사람이 아가씨 들먹거리는 게 제일 싫었는데.”
“윤새라고 부르시면 돼요. 혹시 저는 어떻게.......”
“아주머니라 불러요.”
“예?”
“이제 아는 사람이잖아요. 우진이 저놈이랑 수레 끌고 오느라 고생했어요. 쌀 가격이 자꾸 오르니 걱정이야, 그렇죠?”
“저희 이제 가 볼게요. 수레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약과도 잘 먹을게요. 안녕히 계세요!”
우진이 윤새의 등을 떠밀며 속사포로 외쳤다. 윤새도 그의 장단에 맞추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정희에게서 충분히 멀어지자 우진이 입을 열었다.
“장터 바로 옆에 사세요. 남편분은 멀리 장사 나가시고요. 초면에는 과격하시기는 한데 좋은 분이에요. 저희가 쌀 사러 갈 때마다 수레 빌려주시거든요. 아시겠지만 안경원에는 수레 둘 곳이 없어서.”
“약과를 명원이랑 영원이랑 나누어 먹으라고 하시던데.”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에 쥔 약과의 개수를 세었다.
“맞아요, 그런데 저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남겨요.”
“영원이가 누구야?”
“여섯 개. 딱이다.”
우진은 품에서 잘 갠 흰 손수건을 꺼내 펼쳤다. 그 안에는 또 다른 흰 손수건이 고이 개여 있었다. 그는 쭈그려 앉아 허벅다리 위에 손에 쥔 약과 여섯 개를 차곡차곡 올리고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 약과가 든 손수건을 다시 처음 펼친 손수건으로 감쌌다. 윤새는 대답을 기다리며 그 복잡한 과정을 쳐다보았다.
“영원 누나가 최명원 언니예요.”
우진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최영원 동생이 최명원. 영원 명원.”
“이해했어.”
“아직 보신 적은 없을 거예요. 일주일 전에 미리 작전에 나가 있었.......”
우진이 합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입을 때리듯 막았다. 윤새는 자신도 모르게 바람 빠진 웃음을 픽 뱉었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 알아내.”
우진은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채로 조용히 앞장서서 걸었다. 알아낼 정도의 정보를 줄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겠다는 의지 같았다.
“알아낼 생각도 없어, 정말이야.”
“.......”
“돕지도 못할지언정 발목 잡지는 않을게.”
“안경원에 남아 주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도움이에요. 그런 생각은 마세요.”
이야, 넌 참 마음이 맑다.
윤새는 속으로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