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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소하 Oct 27. 2024

1 - 성윤새 (4)

판타지 독립운동물 || 장편소설『 별이 그리 정했다 』

    명원이 조심스럽게 윤새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가 있자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따뜻해 윤새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힘을 주어 일어나자마자 다리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너풀거렸다. 그러자 착한 명원은 다시 괜찮다고 다독이며 윤새의 겨드랑이 밑에 팔을 집어넣어 그의 몸뚱이를,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으나, 조심스럽게 질질 끌고 나왔다. 정신을 차린 윤새는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우진을 보고 자신의 모양새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인지했다.

    “어떡하지.”

    우진이 중얼거렸다. 혼잣말인 줄 알았으나 명원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저씨가 알아서 하시겠지.”

    윤새는 배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멍하니 닫힌 방문을 쳐다보다 이질적인 기분에 미간을 구겼다. 아저씨가 하나 더 계셨던가. 윤새는 누나면서 진운이 아저씨일 리는 없었다. 우진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그 알아서 하시는 아저씨는 누구란 말인가.

    “윤새 들어와라.”

    자다 일어난 것 같은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네?’라고 답하고 나서야 당황스러움이 찾아왔다.

    “윤새, 들어와라.”

잘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목소리가 이번에는 단어를 끊어 말했다. 하지만 윤새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알아들었다.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부르는 목소리가 틀림없이 경식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경식이 죽었다는 생각은 윤새의 주제 넘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경식은 보기보다 훨씬 덜 깊은 상처를 입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윤새의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싹둑 자르듯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시 쓰러지기 전에 얼른.”

    생각이 뚝 끊겼다. 윤새는 허겁지겁 방문을 열어젖혔다. 경식은 나올 때의 모습 그대로 누워 있었다. 윤새가 끌려나가고 나서도 탄환을 빼기 위해 고군분투한 방 안은 피바다였다. 윤새는 아까 그 목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차마 경식을 내려다볼 자신이 없어 치켜뜬 눈으로 방을 한 바퀴 훑었다. 영원은 피곤한 얼굴로 양반다리를 한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진운이 품 속에서 깨끗한 헝겊을 내밀자 그는 고개를 한 번 꾸벅이더니 볼에 튄 피를 문질러 닦았다. 윤새에게 들은 것이 헛것인지 귀신인지 친절히 가르쳐 줄 사람은 없는 듯했다. 윤새는 결국 시선을 가라앉혀 밑을 쳐다보았다.

경식이 피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었다. 절반쯤 뜨인 눈이 두려워 윤새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왜 다 감은 눈보다 조금 뜨인 눈이 더 죽은 사람의 것 같은 걸까. 그때 경식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까지 쉬었다.

    “죽다 살아났다, 이놈아.”

    “어떻게…… 살았지…….”

    “그게 할 소리냐?”

    윤새는 경식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숨을 참았다. 경식의 헛웃음이 새어나와 손가락을 간질였다. 경식이 다시 눈을 반쯤 뜨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까 네가 지혈할 때 말이다.”

    “맞아, 지혈. 계속 지혈을 해야…….”

    윤새는 다급히 이불을 걷어 경식의 옆구리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확인했다. 상처가 사라졌다. 어디를 다쳤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던 총상은 어느새 사라지고 판판하고 매끄러운 새살이 자리잡고 있었다.

    “너를 어찌해야 하나 계속 고민했거든. 그런데 네가 끈을 질끈 매는데, 이야아……. 딱 아픈 게.”

    경식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이제 되었구나, 싶었다.”

    경식은 영원히 그 한 숨으로 살아갈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이내 낮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윤새는 멍한 얼굴로 어느새 뒤에 다가온 명원을 올려다보았다. 명원은 눈치를 살피듯 진운과 영원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명원과 눈이 마주친 우진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불멸不滅.”

    명원이 글자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경식 아저씨는 계속해서 살아나요.”

    윤새가 아무 말도 없자 명원은 서둘러 덧붙였다.

    “탄환부터 빼려고 한 건 숨이 끊어지면 상처가 바로 아물어서예요. 저번에 탄환이 든 채로 상처가 닫혔을 때 아무리 해도 뺄 수가 없어서 다시…….”

    명원은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 다음부터는 최대한 신속하게 안에 남아있는 것부터 빼요.”

    우진이 윤새가 걷어놓은 이불을 다시 경식의 가슴까지 덮이도록 올렸다. 방 안에는 경식의 코골이만이 잔잔한 돌림노래처럼 울려퍼졌다.

    “누나, 많이 놀라셨죠. 외부인에게는 능력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 게 원칙이거든요. 그래서 섣불리 알려드릴 수가 없었어요. 아, 그렇다고 누나가 이제 알았으니까 월성회라는 건 아니고…….”

    우진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골랐다. 지나치게 시간을 오래 끄는 그에 명원이 답답했는지 윤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단순해요. 경식 아저씨가 믿으니까 우리도 언니를 믿는 거예요. 아무나 믿으시는 분이 아니라.”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진운이 윤새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그는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낯간지러운가요? 하지만 믿음 없이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어요.”

    명원이 웃으며 물어보았다. 윤새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는 성천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도 믿음에 관한 말을 비슷한 어투로 해 주었던 것 같다. 윤새는 명원이 이끄는 대로 비틀거리며 안경원 바깥으로 나왔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사이에도 해와 달은 제 몫을 해 어느새 하늘은 검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명원은 조금 걷다 가장 가까운 골목에 윤새를 밀어넣고 본인도 벽에 기대어 섰다.

    “저는 큰일 치르고 나면 이렇게 조용한 곳에 서 있어야 마음이 정리되더라고요.”

    “고마워, 너도 정신 없었을 텐데.”

    “보기 힘든 건 맞아요.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까 다쳐오실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더 아프고 안 좋아요.”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오갔다. 윤새는 여러 번 곱씹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랑은 어떻게 만났어? 나는 굶고 다닐 때 밥 한 끼 얻어먹었어.”

    명원은 발끝으로 흙을 파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고아가 되었을 때 밥 여러 끼 얻어먹었어요.”

    “아…….”

    “꽤 지나서 이제 괜찮아요.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으면 언니한테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난 언니가 참 좋거든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요. 말 걸고 싶고, 속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다사다난했지만 경식 아저씨가 언니를 믿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명원이 발 딛고 선 곳에 작은 구덩이가 파였다. 윤새는 자신이 대답을 해야 대화가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온정에 섣불리 반응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서 명원의 친절을 받아들이며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명원은 자신이 파 놓은 구멍을 발로 다시 살살 덮었다. 하늘은 완전히 까맣게 물들어 둘을 비추는 것은 달빛과 조금의 별빛뿐이었다. 명원은 달을 등지고 윤새를 보고 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식 아저씨가 믿으니까.”

    명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먹을 쥐어 손등이 보이도록 윤새에게 내밀었다. 주먹 쥔 손가락 틈 사이사이로 미약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태양보다 어둡지만 달빛보다는 조금 밝은 빛은 주인의 손가락을 삐죽거리는 모양새로 비집고 나왔다. 빛줄기는 끝까지 뻗어나가지 못하고 명원의 주먹 근처에서 둥그런 모양으로 머물렀다. 이윽고 명원이 주먹을 펴 손바닥 위에 완벽한 구로 빚어진 빛 덩어리를 올려두었다. 빛은 오로지 둘만을 비추며 손바닥 위에 달처럼 가만히 떠 있었다. 윤새는 빛 때문에 일렁이는 명원의 얼굴을 보았다.

    “혼월混月.”

    명원의 왼쪽 뺨에 보조개가 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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