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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소하 Oct 27. 2024

1 - 성윤새 (5)

판타지 독립운동물 || 장편소설『 별이 그리 정했다

    경식은 정확히 하루가 지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윤새는 큰방을 지나다 무릎을 꿇고 이불을 개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옆에서 진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이 그득 담긴 잔을 들고 경식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윤새가 처음 안경원에서 그를 마주친 이후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영원이야 첫만남이 그리 좋지도 않았을 뿐더러 윤새의 인생에 아무런 지분도 차지하고 있지 않기에 넘어갈 수 있으나 진운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않는가.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겨우 일구어놓은 윤새의 일상을 박살내고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 한마디 사과도 없는 것이 윤새는 야속했다. 어쩌면 진운이 아니라 함께 사진관에서 보냈던 세월이 야속했는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빠른 명원은 윤새와 안경원을 잠시 보고 있을 때 진운이 지나가면 윤새 대신 그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명원은 그날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달덩이를 혼월이라 칭했다. 어지럽히는 달이라고 말했다. 이 예쁜 빛덩이가 무엇을 어지럽힐 수 있냐고 윤새가 장난 섞인 물음을 던지자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태양이라 답했다. 달빛이 태양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말은 왜인지 윤새의 가슴 한 구석을 간지럽혀왔다.

    경식은 죽다 살아난 이후 안경원에만 붙어 지내며 열심히 장사를 했다. 우진은 광명 안경원이 조선에서 제일 가는 안경원이라며 싱글벙글 웃었다.  걸어서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반대편의 사진관에서만 지냈던 윤새에게는 금시초문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진이 인력거에 실어서 태우고 오는 손님은 대부분 비루한 조선땅에서도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윤새는 김용수와 마주칠까 봐 걱정하며 인력거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바깥을 살폈다. 그러나 경식의 계산인지 친절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윤새는 내심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윤새는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다. 진운이나 영원과의 관계는 전혀 진전된 바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부정적인 감정도 반복되면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진운의 뒤통수를 통해 깨달았다. 그 새까맣고 반질거리는 뒤통수를 볼 때 더 이상 야속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윤새는 다행스럽게도 사진관에서 쫓겨날 때와 생각했던 경우의 수들에 비해서는 훨씬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경식이 가족 회의랍시고 윤새까지 월성회 회의에 끌어들이기 전까지는.

    “이게 무슨 가족 회의입니까? 월성회 작전 회의지.”

    윤새는 기가 막힌 얼굴로 기다란 탁자에 모여 있는 월성회 단원들을 보며 거칠게 속삭였다. 우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뻣뻣하게 손을 흔들었다. 윤새의 곁에 선 경식은 팔짱을 끼고 서서 뻔뻔하게 말했다.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식사하면 그게 가족이지.”

    “저는 다른 지붕으로 가렵니다.”

    “우리가 다른 지붕으로 갈 거다.”

    말문이 막힌 윤새를 보며 경식이 호탕하게 웃었다.

    “안경원은 작전 장소가 아니거든.”

    경식은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윤새를 의미심장하게 가리켰다.

    “윤새 너는 집만 잘 지키면 돼. 그건 월성회가 아니어도 당연히 해야지. 맞지?”

    솜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경식이라도 비밀 결사의 우두머리는 맞는 모양이었다. 윤새의 등장에 어수선해진 분위기는 그가 탁자의 맨끝에 가서 지도를 펼치고 흰 봉투를 내려놓는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에도 웃음기가 얼굴에서 가시지 않는 우진조차 긴장한 듯 조용히 지도를 훑는 경식의 손가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윤새와는 만난 적 없는 제 3자를 호위하는 것이 주가 되는 작전이었다. 임의로 붙인 ‘하늘소‘라는 이름을 가진 제 3자는 무장 투쟁 단체가 무기와 식량을 구입하는 데 사용될 자금의 운반책이었다. 월성회의 임무는 하늘소가 경성에서 만주까지 가는 기차를 무사히 타도록 호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호위란 하늘소의 몸뚱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돈을 품고 무사히 만주 땅을 밟기 위해서는 그의 얼굴과 신상까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보호해야 했다. 지킬 것이 많은 임무였다.

    “삼천원이면 큰 액수인데요. 나누어 조달할 방법은 고려해 보셨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영원이 질문을 던졌다.

    “작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낫다는 판단이다. 그 어느 때보다 밀정이 판을 치고 있거든. 저번 자금 조달 작전도 정보가 새어 나가서 엎어졌었고. 그때는 식량을 구하기위한 오백원이었지만 지금은 달라. 총을 살 삼천원이다. 쥐새끼가 한 마리라도 있으면 얼마나 나누는지는 상관 없어지지. 그러니 한 사람에게 맡기고, 그 한 사람을 우리가 목숨 걸어 지켜야 한다.”

    “이렇게 큰 돈은 어디에서 난걸까요. 분명 조선인일 텐데, 어떻게…….”

    영원이 돈이 든 흰 봉투를 조심스럽게 집어들며 말했다. 흰 봉투에는 ‘강산상회‘라고 정갈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 글씨를 읽는 영원의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강산상회라면 사정이 어려워 더 이상 지원하기 어렵다던 무역 회사잖아요. 이렇게 큰 돈을…….”

    “아마 마지막 지원이 될 거야. 강산상회의 마지막 숨결을 바친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이 작전을 성공시켜야 해.”

    경식이 손바닥으로 탁자에 놓인 커다란 지도를 짝 소리가 나도록 쳤다. 윤새는 구불구불한 선으로 그려진 골목들과 오른쪽 끝에 표시된 붉은 점을 보고 작전 장소가 며칠 전 우진과 함께 수레를 끌고 찾아갔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정희라는 여자는 약과를 여섯 개나 주었다. 윤새를 보고 개수를 하나 더 늘려 준 것이었을까. 중요한 작전에 가담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면 의심스러울 정도로 풍족했던 인심이 납득이 되었다. 그날 먹었던 약과의 자글자글하게 달달한 맛이 혀끝에 맴돌아 그는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작전은 자정에 시작한다. 하늘소는 작전 전날 새벽 고 선생 집에 도착해서 자정까지 쥐죽은 듯이 숨어 있을 거야. 역할은 평소와 똑같아. 나는 하늘소 바로 곁에서 엄호한다. 죽지 않으니 혹여나 들켰을 때 총알받이가 되어도 상관은 없지. 이동 경로는 골목이 많고 담을 넘기 용이한 곳으로 정해 놓았다.”

경식은 심이 위를 향하도록 연필을 쥐고 지도 위의 푸른 선을 따라 구불구불 그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월성회 단원들을 힘이 들어간 눈으로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모두가 경로를 이해했으리라는 확신을 담은 눈빛이었다. 윤새는 경식의 눈길이 닿기 전에 보지 못한 척 지도로 시선을 내렸다.

    “영원이랑 명원이, 너희는 동료가 하나라도 적에게 발각되어 쫓긴다면 유인해라.”

    그는 이번에는 검은 선을 따라 연필을 그었다. 검은 선은 푸른 선의 왼편에서 구불구불하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 동선으로. 다른 골목이긴 하지만 우리와 아주 가까이 붙어서 이동할 거니까 변동이 생기면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거다. 목적지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도 않는다면 그대로 안경원으로 돌아가. 우리는 절대 얼굴을 들켜서는 안 된다.”

    경식은 노란 선을 따라 연필을 그었다. 노란 선은 푸른 선의 오른편에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건 우진이 동선. 우리 앞에서 달리면서 미리 상황을 파악해. 문제가 생기면 즉시 신호를 보내라. 우진이가 신호를 보내면 모두 두 번째 안으로 넘어간다.”

    경식은 마지막으로 붉은 선의 시작점 위에 연필을 툭 올려두었다. 윤새는 붉은 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붉은 선은 애써 나아갔던 길을 되돌아가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선의 끝을 보자마자 작게 숨을 들이켰다.

    “두 번째 안은 안경원이다.”

    윤새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경식과 눈을 맞추었다.

    “여기서부터는 윤새가 들어간다.”

    올곧을 줄 알았던 경식의 눈빛이 촛불 탓인지 일렁이고 있었다. 윤새는 그 눈동자 안에서 확신과 불안을 동시에 읽어내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며 무엇에 대한 불안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모두 윤새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한테 하듯 설명해서야 잘 알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공기가 윤새의 말을 집어삼킨 것처럼 모두가 조용했다. 윤새는 참지 못하고 마른 입술을 축인 다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누군가 윤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왔다. 명원이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엄지로 손등을 살살 쓸었다. 늘상 딱딱하고 건조한 눈빛이었던 영원조차 놀라움이 묻어난 표정이었다. 윤새는 명원이 손을 저절로 놓아주길 기다리다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심스럽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경식의 눈은 다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붉은 선 위에 다시 연필 끝을 올렸다.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으면 후퇴하는 게 안전해. 기차를 탈 수 있는 기회는 두 번이야. 첫 차를 놓친다면 30분 뒤 다음 차를 탈 수 있어. 목적지까지 시간 안에 갈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하늘소에게 안경원으로 돌아가라 이를 거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늘소가 반드시 다음 차를 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어야겠지. 방해하는 놈들은 다 죽이고 있겠다는 뜻이야. 여력이 된다면 안경원 쪽으로 돌아갈 테지만 우리가 있는 곳까지 네가 하늘소를 데리고 와야 할 가능성이 커. 우리와 합류하기 전까지 하늘소와 자금을 지키는 게 네 역할이야.”

    안경원에서 다시 방향을 트는 붉은 선은 기차역으로 곧장 향하는 최단 경로였다. 지도를 자세히 살피고 골목 사이사이 지리를 애써 외우지 않더라도 근방에 오래도록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쉬운 길이었다. 집중하는 윤새의 얼굴을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의사 표현이라고 생각했는지 경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늘소는 천마산에서 활동하던 해산 군인 출신이야. 총 다루는 건 물론이고 제 몸 지키는 데는 문제 없을 거다.”

    이 이상 구체적일 수 없었다. 다만 궁금한 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저를 믿습니까?”

    경식은 사뭇 놀란 낯빛을 띠고 윤새를 보았다.

    “너보다는 네가 보는 미래를 믿지. 그건 네 주관적인 판단 하에 보이는 게 아니잖아.”

    “아저씨.”

    명원이 경식을 향해 뾰족한 눈빛을 쏘았다. 그러나 윤새는 방금까지 세차게 뛰던 심장이 다시 느릿해진 기분이었다. 경식의 말이 맞다. 윤새는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아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낭떠러지 밑으로 성천을 떠나보내고 난 후부터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리라는 확신이 들어야만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월성회의 작전에는 어찌하여 가담할 마음이 생기는가. 가담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날 경식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을 보고 윤새는 확신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이상 월성회를 돕지 않는다면 그들의 죽음의 반절은 윤새의 탓이 되리라는 걸. 게다가 명원에게 정을 조금이라도 준 상황이다. 오래도록 일한 사진관에서 단숨에 쫓겨난 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은 없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못 박아놓았으나 아침마다 이불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눈 맞추는 그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마음 한 조각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저놈이 나한테 더 많이 줬다, 이놈아.”

    경식이 명원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약하게 누르며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하튼 안경원을 부탁한다, 윤새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새는 경식이 운을 떼고 나서야 한 사람이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운은 회의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지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 위에 경식이 짚었던 동선들 외의 다른 선은 없었다. 작전에서 배제된 것이다. 윤새는 진운의 얼굴을 몰래 보고 싶었으나 바로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고개를 들면 바로 시선이 부딪힌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을 접었다. 대신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먼산을 쳐다보는 것을 택했다. 

    “작전이 사흘 뒤야. 장마 기간이 지나서 하늘이 맑을 거다.”

    경식은 진운의 대답을 기다리듯 잠시 말을 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진운에 그는 투우– 소리를 내며 눈알을 한 바퀴 굴리더니 목적지인 역을 가리켰다.

    “목적지에도 기다리고 있을 한 사람이 필요해. 무사히 도착했다 하더라도 마냥 방심할 수 없으니 상황을 봐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깍두기인 거지요.”

    경식에게만큼은 말대꾸 한 마디 하지 않을 것 같던 진운이 끝이 날선 문장을 뱉었다.

    “김진운, 너는 작전이 놀이로 보이냐? 시답잖은 깍두기 운운할 정도로 의미 없는 작전 아니다. 이건 효율이야.”

    경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지도를 흔들어 보였다.

    “선만 몇 개 직직 그어두고 점 두 개 띡 찍으니까 이게 쉽게 나온 작전 같으냐? 백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아주 촘촘하게 짜서 그린 동선이야. 너 하나 봐줄 정도로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

    진운은 입을 연 것을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지만 경식은 대수롭지 않게 지도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남은 이틀 동안 변동 상황이 생기는지 확인한다. 저잣거리에 들리는 소식이든 마을 뒷소문이든 앞소문이든 작전에 누가 될 만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바로 다시 모인다. 작전일 전까지 각자 위치, 동선, 역할 모두 숙지하고 하루에 열 번은 상상해 봐. 그리고 마지막으로,”

    탁자 한가운데서 촛불 홀로 방을 밝히고 있었다. 경식은 그것을 축배를 들듯 천천히 들어올렸다.

    “상상의 끝에는 늘 승리를 두도록.”

    그가 일렁이는 촛불을 불었다.

    어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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