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독립운동물 || 장편소설『 별이 그리 정했다 』
영원이 안경원을 나서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윤새가 손을 들며 웃는 것을 보고 묘하게 안심하는 표정으로 나갔다. 그 뒤를 명원과 경식이 따랐다. 우진은 곁눈질로 윤새를 흘끔거리며 품에 가득 차는 용맹이를 안고 나왔다. 그대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당장은 편할 듯했으나 그는 작전에 나가는 사람을 배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낮은 헛기침을 하자 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우진은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이고 경식을 찾는 시늉을 하며 허겁지겁 나갔다.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은 진운이었다. 그는 앞서 나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두건으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저기요.”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은 굽히는 것과 엄연히 다르다. 굳이 하나하나 따지자면 둘의 관계를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잡아내린 것은 진운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또한 사진관에 몹쓸짓을 할 명분은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월성회는 오로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만들어진 조직이니까. 진운은 분명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경원에서 진운을 마주치자마자 느꼈던 분노는 사진관에서 구르며 견뎌왔던 시간들이 통째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났으니 10년 동안 일했던 경력은 당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안 좋은 소문이 아직까지 퍼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심 함께 일을 이어갈 수도 있는 동료라고 생각했던 진운이 윤새의 삶에서 송두리째 뽑혀간 것은 윤새로서는 매우 큰 충격이었다. 왜였을까. 윤새는 천천히 뒤돌아보는 진운을 덤덤하게 쳐다보았다. 왜긴, 껍데기뿐인 대화라도 정은 붙나 보지. 윤새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단어를 골랐다.
“죽지는 말고.”
애매하게 문장이 끝났다. 그 뒤에 덧붙일 말은 생각해 두지 않았다. 잘 가라고 말하기에는 가는 곳이 너무 위험하고, 다녀오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이 붙는다. 그러니 최악을 면하자고 말하는 수밖에.
“잘 보고 있어요.”
진운은 짤막하게 답하고 문을 닫았다. 윤새는 촛불조차 켜고 있지 않아 캄캄해진 안경원에 홀로 남았다. 그는 숨을 참고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독한 놈.”
그는 침묵 속에서 나직하게 뱉어 보았다. 주인 없이 텅 빈 안경원이어서 그런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말끝이 울렸다. 용기를 내서 더 크게 말해 보았다.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가족도, 소유도 아닌 것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 마음은.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편해진 세상에 태어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국을 지키는 마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서는 그 마음은. 그들은 끝을 알고 있는가? 누구보다 따뜻하게 답해 주었을 소중한 사람은 절벽 밑으로 사라졌다.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은 채로. 윤새는 마지막 순간까지 뜨거웠던 그 눈동자를 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보고 싶었다.
‘잘 보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아야 할 때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천히 뜬 윤새의 눈이 하늘에 뜬 달처럼 푸르게 빛났다. 여전히 어둠이었다. 달려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단원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달을 쳐다보았다. 그 주변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별도 차차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윤새는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잠시 지금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안경원이 사라지면 갈 곳이 없다. 명원이나 영원이 사라진다면 적어도 2년, 아니 5년 동안은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경식이 사라지는 것은 이미 보았다. 그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라지는 형태는 죽음뿐이 아니다. 이 말은 평생 경식에게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진이 사라져도 마찬가지다. 마주보고 살갑게 대화한 사이인지라 5년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성천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운은 어떠한가. 그제야 윤새는 그에게 굽힌 것을 후회했다. 사진관에서 보낸 시간도 있으니 그가 사라진다면 꽤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이라도 괜찮은가?
아무 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