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독립운동물 || 장편소설『 별이 그리 정했다 』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작전 두 시간 전이었다. 윤새는 작전실 구석의 의자에 앉아서 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경식에게 다가갔다. 경식은 총을 겉옷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돌아오는 곳이 꼭 안경원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윤새는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동선에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민가가 충분히 많던데요. 고정희라는 분은 월성회의 조력자시지요?”
“고 선생의 집은 안 돼. 되돌아가면 발각되기 쉽다.”
“여기서 안경원 오래 하셨죠. 밥 사 주신 지 10년도 넘으셨으니까.”
“배은망덕하게 까먹은 줄 알았더니.”
“안경원 외의 선택지가 충분히 많지 않았냐고 여쭙는 겁니다. 경성에서 이렇게 오래 싸우고 계실 정도면 고 선생님 댁 하나만 월성회를 돕고 있는 게 아닐 테고…… 그렇다면 그 집에 몸을 숨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경식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턱을 짚고 오른발을 두어번 탁탁 굴렀다.
“그러니까 윤새 네 말은, 널 월성회에 끌어들이려고 무리하는 게 아니냐– 이 말이지?”
“아뇨, 전 이미–”
“너는 여러모로 진운이랑 닮았구나.”
윤새는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경식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레를 쳤다.
“너희 둘은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르친 일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왜 그러는 거냐, 엉?”
경식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팔짱을 끼고 일어섰다.
“되었다, 아주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태도도 어느 정도는 중요하지. 하지만 불안과 의심은 작전 수행에 있어서 차질이 될 수 있으니 분명히 해 두자.”
경식은 탁자로 걸어가 구깃해진 지도를 한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는 등불을 가지고 와 지도에 불을 붙였다. 지도가 안으로 말려가며 까맣게 그을리고 타올랐다. 종이 위에 그려진 동선들이 흔적도 없이 바스라졌다.
“너희들이 죽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그렇게 둘 거야. 선택을 하도록.”
윤새는 한때는 지도였던 잿더미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손끝이 까맣게 물들고 패인 지문만 희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을 판단해야 하는 사람은 참 괴롭겠습니다.”
경식이 작은 빗자루를 가지고 왔다. 그는 아무 부탁도 하지 않았지만 윤새는 서랍에서 얇은 판자를 꺼내 경식이 잿더미를 쓸어내릴 수 있도록 받쳤다. 경식은 재가 날리지 않도록 천천히 빗질을 했다.
“괜찮다. 그건 신이 오래전 정해 둔 결과니까.”
그 말을 하는 경식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되물으려던 순간 우진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늘소가 고 선생 댁에 도착했답니다.”
“오는 길에 특이사항은 없었고?”
“잠시만요.”
우진의 뒤로 용맹이가 걸어들어왔다. 윤새는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아있는 꼬리를 보고 저도 모르게 빙글 웃었다. 우진이 쭈그려 앉아 용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는 길은 어땠어?”
용맹이는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이따금씩 짖는 소리를 내기를 반복했다. 우진이는 경식이 한 질문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아이고, 그랬어?’ ‘대단한걸' 같은 말을 반복하며 연신 용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서더니 경식에게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동선 내의 순찰 강도는 평소와 같다고 합니다. 1구역부터 4구역까지 모든 골목을 동네 개들이 살폈는데 작전에 방해될 만한 요소는 없답니다. 다만 역 쪽에는 순찰이 강화된 듯하니 조심하랍니다.”
윤새의 얼굴에서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반면 용맹이의 미소는 짙어졌다. 경식은 뒤집어졌다 공중제비를 도는 윤새의 속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용맹이에게 다가가더니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등을 쓸었다. 그는 일어서려다 윤새의 멍한 얼굴을 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추었다.
“까먹을 뻔했구나.”
그는 안주머니에서 작고 동그란 갈색의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그것을 끼우고 굴리다 손바닥을 쫙 펼쳐 내밀었다. 용맹이는 곧바로 코를 박고 그것을 핥아먹었다. 윤새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와중에도 그 무언가는 아무래도 강아지 간식이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아, 이제 밝힐 때도 되었다 싶어서 숨기지 않았는데.”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안심시키는 것과 공포감을 가중시키는 것 중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윤새의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후자의 효과를 많이 받았기에 평소의 사회성을 발휘하여 화답할 수 없었다.
“정식으로 밝히겠습니다.”
우진은 인사를 시키듯 용맹이의 앞발을 살짝 들어올렸다.
“대화할 수 있어요.”
한순간에 안겨 준 당황스러움에 비해 너무나도 짧고 간결한 문장이었다. 윤새는 더 구체적인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경식을 쳐다보았지만 그마저 웃고 있는 용맹이에 시선을 빼앗겨 헤벌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작전 설명 때 경식이 우진에게 보내라고 당부했던 ‘신호'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윤새는 당시 앞서 달리는 우진이 신호를 보낼 방법이 존재하는지가 의문이었다. 만약 교전이 일어난다면 우진이 굳이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뒤따르는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도 알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신호란 순사나 군인에게 들키지 않았을 때를 가정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무엇인가. 신호탄을 쏘아올리면 자신들이 작전을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동네에 알리는 꼴이 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니까. 들키지 않고 상황을 알릴 방법은 다시 일행에게 돌아와 손짓발짓으로 알리는 것뿐이나 그만한 비효율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진과 함께 앞서 달리던 용맹이가 일행에게 돌아온다면. 용맹이가 돌아오는 것 자체가 신호가 된다. 모든 일은 아주 조용히, 어쩌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윤새는 여전히 빳빳하게 솟아오른 용맹이의 꼬리를 보았다. 왜인지 용맹이의 눈빛이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강직하고 성숙해 보였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용맹이도 윤새의 눈초리를 느꼈는지 우진에게서 시선을 떼고 윤새를 마주보았다. 윤새는 잘못 보았나 싶어 고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저 강아지라고 생각했을 때의 맑은 눈빛이 새삼스럽게 아주 진지하고 어색해 보였다. 마치 처음 인사를 나누는 상황 같았다. 그러니까, 마치 사람처럼.
“뵌 건 한참 전이지만 인사는 해야 할 듯싶어서.”
윤새는 용맹이와 최대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정중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성윤새라고 합니다. 저의 선입견…… 때문에 알아뵙지 못하고 그동안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맹이가 웃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며 윤새의 손바닥 위에 앞발을 턱 올려놓았다. 빳빳하게 치켜 올라가 있던 꼬리가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윤새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앞발을 살짝 쥐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못미더워 보이시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윤새는 조심스럽게 용맹이의 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풍선이 있었나 싶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경식이 벌개진 얼굴로 윤새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는 안간힘을 써서 다물어 놓은 그의 입술 사이에서 나고 있었다. 우진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아주 잘게 들썩이고 있었다.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지 주먹을 말아쥐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괴로워 보였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것은 용맹이 하나였다.
우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어깨를 두 손으로 살포시 눌러 잠재웠다. 그는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푹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나, 용맹이는 개 맞아요. 그냥, 그냥…… 제가 동물이랑 대화할 수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