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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구름 Jun 06. 2022

28년 만에 답장을 쓰며

할아버지의 사소한 일상을 위하여



할아버지가 전화로 주셨던 연구과제에 대해 정리해 보았어요.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드는 것은 꼬마들 상담에서도 종종 이야기하는 주제예요. 내가 어떤 문제를 잘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때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요. 원인은 매우 다양한데, 원래 불안이 높은 기질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많아서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는 상태라 그럴 수도 있고, 최근 감당하기 버거운 충격적인 일을 겪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전부 합쳐져서일 수도 있을 거예요. 살아오면서 여러 어려운 것들에 잘 대처했던 경험이 있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불가피하게 발생될 수밖에 없으므로, 예측 불가한 것에 대해 불안감이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죠. 그것에 지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싶으니 자꾸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이겠죠?     



우선, 불안감이 인간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 나의 모습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니 지금의 상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불안한 그 마음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고, 버리고 싶고,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때가 있지요. 특히 그 불안한 마음으로 인해 유발되는 생각들이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정도라면, 오늘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도들이 필요하겠어요!     



불쑥 방문하는 생각을 없애려 하면, 생각에 꽁꽁 납치되어 내가 인질이 되어버리는 기분이죠. 역설적으로, 생각을 어딘가에 억지로 넣으려 할수록, 생각들은 더 자주 끈질기게 방문한다고 해요. 그러니 나를 괴롭히는 생각이 불쑥 찾아왔을 때 “그래. 오늘도 왔구나.” 하면서, 손님 대하듯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지, 네가 자꾸 찾아오는구나.’라고 알아주세요. 그리고 생각은 생각일 뿐이며, 내가 이제껏 너에게 지배되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고 그 생각에게 말하는 거예요. 생각이 불쑥 찾아오면, 어떻게 전환시킬지 반복적으로 연습이 필요하고, 그 생각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해요(이전에는 네가 내 주인이 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두지 않겠다). 물론, 연습을 해도 그 생각은 단번에 없어지지 않고 꾸준히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기꺼이, 올 테면 와보라고 마음먹어야 해요.     



그렇다면 연습을 어떻게 할까? 할아버지의 하루를 돌아보아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밥 먹고, 잠을 자는 것 이외에 무엇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지. 일상생활에서 즐거움을 주는 활동들을 찾아서 하루 일과를 꾸려나가는 것이 필요해요. 생각에 집중을 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잘 지내는 것에 의식적으로 집중할 것. 그것을 하는 동안은 적어도 그 생각들이 덜 떠오를 거예요. 과거에 즐거움을 주었던 것이어도 좋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도 좋고. 어떤 것이 나에게 즐거움을 줄지, 의미를 줄지 생각해서 해보는 거예요. 아주 사소한 것도 좋아요. 동네 한 바퀴 돌기, 좋아하는 냄새 맡기, 국민체조, 좋아하는 노래 부르기, 노래 듣기, 책 읽기, 화투 놀이, 앨범 보면서 옛날을 돌아보기 등등.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좋으니 선택해서 해보는 것을 추천해요.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서 누리고, 남는 시간에 저에게 편지 답장을 써주세요. 할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나서, 예전에 초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보내준 편지가 떠올랐어요. 1995년 12월 7일에 보내주신 편지. 28년이 지났지만 아직 잘 간직하고 있었어요. 이 편지가 그 편지의 답장이 되겠네요. 할아버지에게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들을 써 둘 테니, 이야기해주세요. 내가 살지 않던 그때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그 시간들을 지내오셨으니까, 할아버지의 경험들을 들려주세요.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편지를 보면서 마음이 따뜻했어요. 초등학생 시절 나의 꿈이 세계 제일의 피아니스트였다니. 꿈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편지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  편지에 어떻게 썼는지 10 후에  기억이 나지 않을  있겠지만, 그래도  편지를 쓰는 순간이 기쁘게 느껴졌다는 것만은 변함없을 것이라 확신해요.     



감사와 사랑을 담아서,     



정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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