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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Apr 30. 2019

#30 <퇴사>

쉼표가 마침표가 되지 않길

01 | 단검 찬 쪼랩이 되었다


A차장은 책 덕후다. 앞으로 변화될 세상이 궁금하다. 잠시 업무에서 한가해질 때면 책을 펼쳐 든다. 독서가 습관이 된 사람은 그 자체로 명화의 주인공과도 같다. B사원은 감바스와 스테이크를 좋아한다.  회도 좋아한다. 커피도 좋아하는 듯 하지만 실은 카페인에 약하다. 가끔 카페인에 취해 열변을 토할 때면 이런 말을 한다. 모든 일에 ‘왜?’를 붙이지 말란다. 그럼 인생이 복잡해진단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 그 이상은 없단다. 한 수 배웠다. C부장은 자주 흥분하지만 본인만의 철학을 갖고 있다. 이상하고 묘하게 합리적이다. 대들 수가 없다. D연구원은 자칭 와인 마니아다. 와인을 주문할 때면 항상 잘 모른다 하고 꼭 주인에게 물어본다. 그리곤 제일 비싼 와인을 추천받는다. 그다음 날은 무조건 엔빵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적 미소에 적응되어 갈 때 명함 덕을 많이 봤다. 명함이 나였고 내가 명함에 적혀있는 회사 그 자체였다. 나를 소개하기도 전에 명함을 먼저 꺼내 들었다. 자칫 타이밍을 놓쳐 명함 교환이 늦어질 때면 초조하기까지 했다. 우스운 일이다. 명함 위에 적혀있는 텍스트 몇 줄로 나를 표현해야 한다니. 


오늘 회사를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책상을 정리하며 명함을 모두 버렸다. 더 이상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만능 키 하나를 잃고 이젠 단검 하나 찬 쪼랩이 되었다. A차장의 경쾌한 키보드 소리와, B사원의 웃음기 가득한 잔소리, C부장의 크나큰 웃음소리도, D연구원의 와인 예찬론은 이젠 추억이 되었다. 


새로운 직장이라는 최종 보스를 앞두고 있고, 칼도 업그레이드하고 공격과 방어에 유용한 강한 갑옷도 만들어야 한다. 무딘 칼을 갈고 매일 같이 정신 훈련도 해야 한다. 당분간은 괜찮다. 그들이 주문을 걸어줬다. ‘잘 지내고 잘 살라고’. 오히려 고맙다. 진심 어린 그들의 주문과도 같은 마지막 인사가. 


날씨가 변덕스럽다.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진다. 그래도 다행이다. 앞으로 당분간 하늘은 맑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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