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
우리는 살아가며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마주한다. 단비가 지나간 뒤 하늘빛 캔버스에 새겨진 무지개를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각각의 색이 내뿜어 완성하는 무지개. 그중에 특히 마음에 드는 띠가 있을 거다. 그 색상 하나만 빼내어 무지개라 우기면 무지개라 할 수 있을까? 감정도 마찬가지다. 여러 감정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인생을 이루고 삶이란 긴 여정을 함께 여행한다.
슬픔이란 감정은 같이 여행하기 어려운 존재다. 자꾸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기쁨을 맛보고 신나게 놀고 싶은데 말이다. 또한 성공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긍정 만능주의 시대에 방해가 되는 친구다. 물리쳐야 하고 멀리해야 한다. 그래서 다들 그런다. '슬픔이'랑 놀지 말라고. 슬프면 우울해지고 그러다 심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고. 너무나 자극적인 언어폭력 아닐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Joy)'는 주인공 '라일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다. 라일리가 행복하면 '기쁨이(Joy)'도 행복하다. 그래서 라일리는 항상 행복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다. 행복은 기쁨이라는 공식을 믿는다. 한 번 생각해보자. 행복이 기쁨이라면, 항상 웃고 즐거운 감정만을 뜻하는 거라면 환각제에 취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걸까? 행복은 다양한 감정의 집합체이다. 슬픈 기억도 행복의 단편이다.
'기쁨이(Joy)'가 '슬픔이(Sadness)'주위로 한 평도 안 되는 선을 그려놓고 나오지 말라고 에둘러 말하는 장면이 있다. 철저히 숨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짠 하다.
'슬픔이(Sadness)' 캐릭터는 약간 뚱뚱한 모습에, 파란색이라는 우울을 옷을 입고 있다. 언제부터 파란색은 슬픔과 우울의 면을 대표했을까? 인류는 푸르른 바다에서 시작했는데. 어쩌면 삶이 태어남 자체가 슬픔임을 알려주려 한 건 아닐까?
예전에 배우 박신양 님이 한 예능 프로에 나와서 강연을 했다. 행복이라는 주제로 말이다. 그는 '과연 기쁘고 좋은 것만이 행복일까요? '슬픔도 행복의 일부분입니다. 슬픔 없이 기쁨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인생이 왜 꼭 행복해야 합니까? 또한 행복이 왜 힘들지 않은 인생이라고 합니까? 인생은 고통입니다.
맞다. 인생은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다. 오죽하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우렁차게 울까?(웃으며 태어나는 아기가 있을까?) 아무튼 인간은 태어나면서 슬픔과 함께했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인생이 아니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메시지였다.
사실 기쁨의 순간은 짧다. 예를 들어 오랜 수험기간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한 순간, 멋진 골을 넣고 우승한 순간, 모두 행복의 단상들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혹자는 행복은 일상의 순간순간에 녹아있다고 표현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슬픔도 알아달라는 거다.
'슬픔이(Sadness)'는 주인공 라일리의 기억을 허락도 없이(?), 동의도 없이(?) 맘대로 매만진다. 불쑥불쑥 '감정 계기판'을 만지기도 하고 핵심 기억을 슬픔의 기억으로 바꾸려 하기도 한다. 그러면 '기쁨이(Joy)'가 부드럽게 '혼낸다'. 함부로 그러면 안된다고. 사실 '슬픔이(Sadness)'도 기억 본부의 핵심 멤버다. 동등한 레벨의 지휘관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면 안 된다. 그럼에도 슬픔 이가 뭐라도 하려 하면 '기쁨이(Joy)'가 불편해한다. 행복이 마치 자신만의 트로피*라도 되는 양.
*사실 트로피(Trophy)는 잘했다고 받는 상장이 아니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소중히 여기는 물건, 즉 승리의 쟁취물, '전리품'이라는 뜻이다. 승자의 상징이다.
슬픔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오랜 친구다.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 있다 세상에 나온 아기가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은 우렁찬 울음소리 아니던가(개인적인 생각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고 그래서 항상 불안을 느낀다. 불안이 밀려오면 세상 홀로 된 듯한 느낌이 들고 우린 그걸 슬픔과 착각한다. 슬픔을 멀리하려 노력한다. 성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성공을 이루려면 유쾌하고 적극적인 활동이 도움이 된다. 많은 관계를 맺으며 그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대중의 힘을 빌려 써야 하기 그렇다. 그렇지 못한 성격을 갖고 있으면 곧 패배자를 의미했고 인생을 행복하게 끌어갈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축 처진 기분과 반사회적인 행동을 슬픔이라 규정짓는 이유다.
슬픔에 관한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갓 헤어진 연인들을 대상으로 이별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비교 분석했다. 첫 번째 집단은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갖고 울었으며, 두 번째 집단은 상대를 비난하게 했다. 세 번째 집단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 떠나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애도의 시간을 보낸 첫 번째 집단이 이별의 후폭풍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비난과 무 행동은 슬픔을 회피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진심으로 슬픔을 자신만의 감정의 자리에 제대로 위치시킨 사람들이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남으로써 더욱 성숙할 수 있었다는 결과로 해석된다.
대부분의 아름 다운 노래와 가사는 슬픔이 만들어낸다. 예전에 가수 윤종신 씨도 결혼하고 너무 행복해서 음악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앨범을 제작하는 기간은 부인의 동의를 얻고 일부러 작은 단칸방을 빌려 철저히 내면을 관찰하는 가졌다. 기쁨이 지속되는 기간에는 나의 깊숙한 내면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방향을 잃은 선박과도 같이 정처 없이 떠돌 수밖에 없다. 환락과 자극에 중독된 삶을 살 수 박에 없다.
영화 속에서 '슬픔이(Sadness)'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캐릭터다. 즐거운 기억만이 행복이라고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기쁨 이에 밀려 무시를 당한다. 그런데 라일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하기 전 그녀의 마음을 돌린 건 바로 슬픔이었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인 무기력, 이해심, 공감, 사랑 등은 모두 슬픔으로부터 비롯된 감정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도 왜 무시를 당해야 하는지.
슬픔은 당연한 것이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래도 미워해선 안된다. 그는 우리의 오랜 친구다. 그렇게 막역한 사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래도 된다. 그와의 우정에 금을 만들지 말자. 오히려 그를 초대해 충분히 즐기자. 언제나 같이 따라다니는 친구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나같이 하찮은 존재도 오랫동안 곁에서 계속 지켜주고 있으니.
p.s 슬픔이 찾아오면 차 한잔 같이 하며 이야기하자. 잠시만이다. 자주봐야 친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