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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Sep 23. 2019

자, 무엇을 담아볼까요?

흙을 만지면 알 수 있는 것들

#1 기분까지 돋보이게 해주는 녀석


  남녀의 사물에 대한 시각 차이를 대충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TV 속 남녀 주인공 둘이 과일을 두고 잠시 실랑이를 벌인다.


'여기 체리 가져왔어, 정말 싱싱해.'

'아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접시가 어디 있더라.'

'접시가 뭐 필요해, 그냥 여기 신문지 깔고 먹으면 되지.'

'아니야, 이 과일에 어울리는 접시가 있단 말이야, 여기에 두었던 거 같은데..'

'나 배고파, 그냥 여기 신문지 깔고 먹는다~'


  좋은 음식이라도 좋은 그릇에 담아내는 게 예의란다. 하얗고 끝이 둥근 접시에 빨간 체리 몇 개가 올라갔다. 색상의 대비로 더 먹고 싶어 졌다. 문득 소쿠리가 생각났다. 싸구려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아낸 감자와 옥수수는 멋진 그릇이 아니더라도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각자의 그릇엔 그들만의 사연이 있다. 사연에 따라 모양도 달라진다. 소쿠리에 체리도 어색함이 없지만 그래도 하얗고 금테 두른 접시가 더 어울린다.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하나. 검은색의 커피는 색상부터 쓴 느낌을 보여준다. 하얗고 둥글게 각이 진 접시에 케이크가 올려졌다. 하얀 케이크가 더욱 달콤해 보인다. 금세 수저를 들어 쪼개 한 입 털어 넣고 싶다. 일조량이 부족한 여름과 가을 사이. 불편하고 처진 마음에 케이크 만한 게 없다. 케이크 한 스푼을 덜어내어 입에 넣고 달달함을 느껴본다. 너무 달다 싶으면 이내 곧 쓴 커피를 들이켠다. 곧 단맛과 쓴맛이 상쇄된다. 커피마저 달게 느껴지고 케이크는 구수한 맛이 나는 듯하다.


  행복이 만족의 문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더 나아가지도 않고 퇴보하지도 않는 중간 상태. 움직이지 않고 더 이상 발전도 없는 그 순간, 저항이 없는 평온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순간 행복을 느끼는 중이다. 하얀 접시에 올린 달달한 케이크 하나와 쓴 커피를 담은 머그컵이 내게 행복을 주고 있다. 돈으로 산 행복이지만 꽤 가성비가 좋다. 



당근 케이크와 커피 한 잔 뿐이지만 접시 하나로 대접받는 기분이다. 나 스스로 고귀해짐을 느꼈다.


#2 내 손으로 만들어보는 그릇, 기다림의 싸움


  턱턱! 두껍고 축축한 흙 덩어리를 몇 번 쳐낸다. 소리가 둔탁하다. 그래도 실컷 먹고 볼록해진 내 배를 때리는 게 아니니 괜찮다. 사용할 만큼 흙을 손바닥 크기 정도로 잘라낸다. 지표면 아래 머금고 있던 수분의 촉감이 시원하다. 발로 툭툭 쳐내며 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의 흙과 다른 느낌이다. 손을 스치며 떨어지는 질감 또한 꽤 평온한 편이다. 오늘 내 손은 각오하고 더럽힐 예정이다. 더럽기 때문에 깨끗해질 이유도 있는 거다. 그래서 괜찮다. 때론 지저분함과 더러움을 각오해야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다. 


  오늘 이 흙을 누르고 문지르고 떼어내어 붙이다 보면 모양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곤 내 삶 속에 스며들 테지. 형태를 갖추고 윤곽을 잡은 뒤 마지막 무늬와 글씨를 새겨 넣으면 완성이다. 


  다른 사람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작품들을 감상해본다. 손이 큰 사람, 작은 사람, 큼지막한 공간이 있는 것도, 기괴한 모양도 각자 성격과 취향대로 만들어냈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게 없다. 부담감을 덜어냈다. 무엇이 나오든 내 뜻대로 하면 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삶의 일부를 경험했다.


  난 실용적인 게 좋다. 감상용으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멋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요긴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 전엔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을 불러줌과 동시에 내게 다가와 꽃이 되듯 내 손을 거치고 쓸 수 있어야 나만의 의미를 지닌다. 난 반찬을 담아낼 접시를 만들기로 했다. 얼마 전 비슷한 접시를 깨뜨려서가 아니다. 진짜다.

   

  바닥면이 될 덩어리를 한 움큼 덜어낸다. 그런 다음 손바닥에 힘을 주어 균일하게 펴낸다. 나름 평탄하게 폈다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면(그럴 필요까지 없다) 울퉁불퉁 손자국이 선명하다. 신경이 쓰이지만 일단 계속 진행한다.

  

  옆 면이 뾰족한 칼을 이용해 모서리를 반듯하게 잘라냈다. 손바닥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밀어낸 불규칙한 면이 시원하게 잘려나갔다. 사과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듯 상쾌한 기분이 잠시 스친다. 다음으로 그릇의 옆 면을 만들 차례다. 자투리 흙 덩어리를 물에 묻혀 손으로 조물조물한다. 그리곤 긴 국수가락 뽑듯 책상 위에서 위아래 반복적으로 굴려댄다. 너무 힘을 주면 안 된다. 울퉁불퉁해진다. 억지로 양쪽을 향해 밀어내면 안 된다. 끊어지거나 갈라져 공기가 들어가면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귀찮다고 빨리 하면 모양이 망가진다. 


  어떤 일이든 힘이 들어가면 망치기 쉽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보면 억지로 이루려 했던 일들은 아픔과 쓰라림만 안겨줬다. 적당한 힘을 쥐고 변해가는 모양에 꾸준히 관심을 둔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은 조급함과 내가 상상했던 완벽한 모양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서로 엉켜진다. 그러다 보면 툭 끊어진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물을 묻히고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불완전한 것들의 모임이다. 불완전한 것들을 부단히 모으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우리는 불완전 하지만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인생에 처음부터 완벽한 건 없다.


  몇 번의 수정을 거치면 접시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 간단한 모양이지만 완벽하다. 삐뚤빼뚤 손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오히려 내 손이 거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다. 난 이 접시에 내 이름을 새겼다. 이 두 글자를 새기기 위해 손이 더러워지고 두께와 부피를 재단하며 온 신경을 다 쏟아부었다.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줄 알았던 내가 음식을 담아낼 그릇 하나를 만들었다. 


  앞으로 유약을 바르고 구워내면 완성이란다. 근데 굽는 도중 깨지고 갈라질 수도 있다 한다. 내 숨이 들어갔고 오랜 시간 나와 같이 할 운명이라면 이 친구는 잘 버텨낼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다. 기다림.


서명을 하라길래 적잖이 당황했다. 아직 완성 전이라 어색해서 그런 듯 싶다
날짜를 착각했다. 괜찮다. 다시 쓰면 된다


#3 내 마음을 모양에 따라 담아낼 수 있다면


 여기 마법의 그릇이 있다. 어떤 물건을 올려놓고 갖고 싶은 것들을 빌면 단 번에 내어준다. 수 만 번 원하는 게 바뀌어도 즉각 즉각 내어준다. 생각하기에 따라 변한다. 그런데 그릇 위에 올린 것들은 변해도 그릇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이 그릇의 주인은 바로 당신이다.


  물론 현실엔 없는 그릇이지만 원래 본인의 가슴속에 갖고 있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만 번 바뀌는 마음에도 각자의 그릇이 있다면. 좋은 그릇은 좋은 마음을 알아보고 아름답고 예쁜 것들만 담아낼 수 있을 테지. 


  어떤 모양이라도 각자 사연이 있어 좋다. 내 마음에 금이 갔더라도 괜찮다. 이가 빠진 그릇은 나름대로 나이를 증명하고 있고 굴곡진 세월을 반영하고 있다. 손자국이 선명한 그릇도 좋다. 정감이 있다. 매끈한 접시는 어떤가. 정갈한 기분이 든다. 어떤 모양을 갖더라도 우리는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오더라도 그 어둠의 빛 마저 환하게 비춰줄 마음의 그릇을 빚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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