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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Feb 19. 2021

성냥팔이 소녀 / 우드수탁

눈(雪)

 

 

 초등학생 때는 밖에 나가 눈뭉치라도 하나 굴려야 겨울이다 싶었다. 눈이 녹아 질퍽거리고, 얼음 위에 미끄러져도 금세 깔깔거리곤 했으니까. 눈을 보면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내려 주신 찹쌀가루’라는 노래를 읊조리고, 연말에는 어김없이 찹쌀가루가 펑펑 내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어린이에게 눈(雪)이란 마치 해리포터의 ‘Headwig’s theme’ 같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겨울의 BGM이었다. 

 

 그러나 마냥 설레기만 했던 겨울은 어느새 사계절 중 가장 어려운 계절이 되었고, 기상예보에 그려진 눈사람을 보면 늘어난 출근 시간을 걱정하며, ‘아, 내일 눈온대. 진짜 출근하기 싫어’를 되뇌는 어른이 되어버렸다.(물론 날씨가 좋아도 출근하기 싫은 건 똑같다)


  요 몇 년간의 겨울엔 눈이 내려도 쌓이지 않고 금세 녹아버려 그저 사계절 중 가장 춥고 힘든 계절이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올 겨울엔 며칠 새 눈이 펑펑 내려 도시를 하얗게 덮었다. 눈은 도시의 화려한 조명을 잠재우곤 담벼락 위에는 눈오리들을 나란히 줄 세웠다. 추위를 경계하고, 출근 시간 줄이기에 혈안이었던 직장인1 마저 길가에 우뚝 서 내리는 눈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누군가 흔들어 놓은 스노우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에 현실은 동화로 변신했다. 그런데 그 동화는 '겨울왕국'도 '스노우맨'도 아닌 슬픈 결말의 ‘성냥팔이 소녀’인 기분은 뜻 밖이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길에서 따뜻한 크리스마스 저녁 만찬을 구경하듯 따뜻하지만 한편으론 무언가 공허한 기분에 잠겼다.


  눈은 체감 온도를 착시 상승시켜버리는 따뜻한 힘을 가진다. 거리에는 동심과 로맨스를 뿌리고,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크리스마스에 바라는 것은 오직 너) 라는 로맨틱한 가사가 울려퍼진다. 심지어 철 지난 스케치북 넘기기도 왠지 용감한 고백으로 둔갑한다. 하지만 나에게 눈은 그저 따뜻하기만 하지는 않은, 조금은 쓸쓸한 그리고 애틋한 존재로 다가오게 되었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떠올리면서도 동시에 잃은 듯한 상실감이 아이러니하게 함께 오는 것이다. 최근에 이런 애틋함을 눈과 함께 너무나도 잘 녹여낸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바로 ‘윤희에게’다.

일본의 겨울
한국의 겨울


 영화는 한국과 일본의 겨울을 교차하여 보여주는데 일본의 겨울은 하얗게 눈이 덮여 따뜻하고 순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반대로 한국의 눈 없는 황량한 겨울은 왠지 마른 잎사귀 같이 쓸쓸하다. 다시 찾아 간 겨울에서 누군가의 묻어버린, 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 눈과 함께 부드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애써 잊었던 기억은 작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여지없이 드러나 현재 서있는 그 곳이 어디든 포지션을 바꿔버릴 정도의 힘을 보인다. 눈은 그 속에서 누군가에게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화선, 또 가까워지는 매개체가 되고 결국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낸다.


  ‘윤희에게’ 속 눈은 잊고 싶지 않은 추억, 묻어두었던 기억의 정면이 된다. 눈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도 조금은 소중하게 만들어 버리곤 하니까. 누구에게나 눈과 함께 떠오르는 '윤희'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아마 올 겨울 함박눈을 보며 ‘성냥팔이 소녀’의 기분을 느낀 이유가 조금은 설명이 되는 듯하다. 눈이 묻어두었던 아마도 다시 마주하지 못할 나만의 '윤희'가 떠올라 따뜻하면서도 한 편으론 다시 돌아갈 수 없음에 조금은 아련해지는 것이다. 결국 추억은 ‘성냥팔이 소녀’가 창으로 바라보던 다른 집의 행복한 크리스마스처럼 더없이 행복하고 따뜻하지만 결국은 가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아닐까.



  성냥의 불처럼 어느새 사라지고야 말겠지만, 눈이 내리면 여지없이 ‘성냥팔이 소녀’가 되어 '윤희'와의 그 어떤 날을 그릴 것이다. 바란다면 그 어떤 날의 겨울을 이길 성냥을 다시 찾기를, 그리고 어딘가 떨고 있을 '성냥팔이 소녀'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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