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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an 23. 2021

시작과 줄긋기 / 우드수탁

어떤 시작


  학생 때 100m 달리기를 하면 항상 중간 즈음에서 순서가 보이지도 않게 무난하게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빠른 스타트가 중요한 달리기에서 항상 조금은 더뎠다. 시작 소리에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자세를 체크하다가 시작 소리를 놓쳐 늦게 출발하곤 했다. (무엇을 위한 자세 체크였나)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든 목표를 향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위를 둘러보고 돌다리도 재차 두들겨보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는 후자에 가깝다. 언제나 시작은 어렵고, 이리저리 따지고 재고 최대한 안전망을 가지고 가려고 한다.


  시작선 앞에 서면 아직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설렘 그리고 기대에 부푼다. 뭔가 이루어내고야 말 것 같은 희망에 이 세상 긍정은 다 끌어온다. 밝은 미래만 상상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언제나처럼 최악의 상황도 가정하고야 만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결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지금 뒤돌아간다면 실패할 가능성은 0%, 좌절감 따위를 맛볼 일도 없다. 그렇게 시작선 앞에서 뒤돌아간 적이 종종 있었다. 30분 달리기 전 체력을 핑계로 이불 속에 빠지기, 이력서를 넣기 전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패스하기, 취미 모임을 둘러보다 그저 다음을 기약하기 등 갖은 핑계로 시작을 미루었다.


  그렇게 시작을 미루고, 주저하다 보니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걷기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 새로운 도전을 당차게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분명 실패하지 않고자 한 돌아서기였음에도 의문의 패배감이 들었다.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가 없다는 건 사람들 눈에 보여지는 결과일 뿐, 스스로는 용기가 없었고 귀찮아 끝내 회피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실패를 피하자고 한 선택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 아닌 도망에 대한 변명일 뿐이었다. 시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느 시점 그리고 어떤 결과로든 실패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일상은 런닝머신이 되어 간다. 도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느새 뒤로 밀려나버리는 조금은 잔인한 일상. ‘꼰대’와 ‘틀딱’이라는 단어 앞에서 작아지지 않으려 애쓰고, 생경한 것들에 익숙해지고자 하는 노력이 쌓여간다. 끝끝내 조금은 뒤로 밀려나는 기분을 느낄 때 쯤, 10대와 20대 친구들과 다른 시간의 농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누구보다 알면서도 그들의 등 뒤에 서있는 듯한 기분은 꽤나 씁쓸하다. 그렇다고 30대의 길목에서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지도 않은 본인은 분명 이정표 어딘가 그 즈음에서 헤매고 있다.


  시간은 차갑게 흘러 어느새 2021년이다. 2020년 다이어리에 끝내 시작하지 못한 일들이 지워지지 않고 마치 어제 쓰여진 것처럼 남아있다. 그대로 2021년에 옮겨 적을까 고민하다 곰곰이 그 이유를 돌이켜본다. 다양한 이유 중 귀찮아서가 대부분이라 한숨을 열번 쯤 몰아 쉬고, 조금은 구체적으로 옮겨 적어본다. 예를 들면 ‘중국어 공부 시작하기’를 ‘중국어 강의 등록하고, 회화 시험 등록하기’로 바꾼다. ‘시작하기’라는 것은 애매해서 시작 선 앞에서 조금만 밍기적거려도 어느새 시작해버린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스스로는 알고 있다…결국 다이어리에 줄을 긋지 못하는 것처럼)


  2021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엔 항상 올해의 목표를 세우고 시작을 카운트한다. 세워 놓은 목표들을 하나씩 돌이켜보니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표지판으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1월 시작점 앞에 서 숨을 한 번 고른다. 꽤나 오래 견지해왔던 멈춤의 미학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올 해다. 스타트 라인 앞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발을 굴러본다. 올 해는 그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달리기가 아닌 스스로의 페이스를 찾는 달리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진정으로 ‘시작’했다고, 그래서 2021년 연말에 당차게 목표 하나에 줄을 그어버리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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