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집중을 할 때 머리카락을 만진다. ‘약간’이란 단어를 약간 자주 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김없이 매운 떡볶이를 찾는다. 습관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세 가지다. 어찌 세 습관 모두 고치고 싶은 것인지는 차치하고, 어떻게 생겼는 지를 고민해봐도 사실 미지수다. 장단을 따져보면 단점 투성이니 합리적으로 일궈진 습관일리는 없다.
사실 이 세 습관 외에 본인이 알지 못하는 습관은 훨씬 많을 것이다. 특히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은 나를 바라보는 상대가 더 알아채기 쉽다. 마찬가지로 나도 타인의 습관을 더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누군가를 꽤 주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처음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 사람의 특정 행동이나 말투가 자꾸 눈에 밟힌다. 의식적으로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그런 습관이 나오는지 분석하고 지켜보게 된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다음 스토리를 맞추듯이, '아 이 쯤되면 그 습관이 나올 때가 됐는데'라며 숨죽이고, 어김없이 그 행동이 나오면 꽤나 통쾌하기도 하다.(변태인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면 소름 끼치듯 본인을 두고 그런다면 펄쩍 뛸 일인데 여지없이 상대의 습관을 꽤나 의식한다.
그래도 여기까진 그저 생소한 무언가를 의식하는 단계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이제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기준은 아직 미지수다. 어떤 상대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크게 의식하지 않게 된다. 상대의 습관이 나에겐 없는 색다른 것임에도 크게 생소하게 느끼지 않는 것인데 그 사람이 친근해서인지, 무관심해서인지 혹은 그 중간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누군가의 습관은 꽤나 거슬린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단순한 습관일 뿐인데,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함과 동시에 매우 비합리적으로 느껴진다.
처음엔 상대에 대한 호감도가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맞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특별한 상대의 습관이 그 어떤 보통 사람보다도 거슬리는 경우가 있다. 함께 보내는 모든 시간이 즐겁다가도, 상대의 특정한 습관을 마주하면 하얀색 도화지에 이상하게 묻은 검은색 반점처럼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반점이 신경 쓰이는 이유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아서’로 쉽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분명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상대를 바라보다가도 그 습관만 마주하면 순식간에 매우 생소한 사람으로 변해버릴 뿐이다. 마치 마라탕을 먹다가 가끔 씹히는 검은 마가 모든 맛을 망쳐 놓는 듯 싶어도 어느새 잊고 또 찾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검은 마’ 알갱이는 끝끝내 문득문득 입에 씹혀 찜찜함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검은 마’의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 답을 찾아냈다. ‘닮았다’였다. 상대의 '검은 마'는 결국 나도 가지고 있는 그리고 고치고 싶은 행동이었다. 세 가지 습관이 말해주듯 내가 익숙하게 하는 행동은 대부분 비이성적이고, 썩 탐탁지 않다. 그런 행동을 상대가 하면 마치 ‘검은 마’를 무심코 씹 듯, 마음이 얼얼해져 버린다. 그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 내 마음에 한 번, 그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 내 행동과 닮아서에 두 번.
분명 누군가를 마주하고 느껴지는 마음은 단 한 개의 마침표로 대답되지 않는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수많은 이유가 새로운 물음표를 만들고 때에 따라 전혀 다른 답을 내어주게 된다. 상대의 습관을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와는 사뭇 다른 이유로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닮아서 좋기도 혹은 싫기도 한 이상한 마음. 닮은 모양새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떠나서 결국 우리는 타인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새로운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나의 새로운 습관을 발견하는 방법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