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Dec 25. 2020

게임 속의 보통 사람들 / 박브이

게임

  얼마 전까지 나는 ‘미스티오스’(1)였다. 고대 그리스의 이곳 저곳을 활보하며 수많은 영웅담을 써내려갔다. 그 전에는 ‘샘’(2)이었다. 단절이 당연해진 요즘의 현실과 조금 닮은 듯한 세계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이곳 저곳으로 배달하며 연결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링크’(3)였던 적도 두 어번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 둘 되찾아 가며 대재앙으로부터 세상을 구해낼 준비를 했다. ‘게롤트’(4)로 지내던 동안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딸을 찾아 다니느라 고생을 했다. 묵묵히 단서를 찾아가며 마침내 딸과 재회했을 때의 감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매력적인 세계를 구현해 놓은 게임은 몰입도가 높다. 수많은 네모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픽셀의 세계에서도 셀 수 없는 밤을 지새왔던 것을 보면, 나날이 발전해가는 그래픽 기술의 덕분만은 아닌 듯하다. 더 강한 적을 쓰러뜨리고 더 강한 상대와 경쟁하며 실력을 연마해 나가는 재미는 스포츠의 영역에 있는 게임의 몫이다. 그것이 아니라 왜 이 세계에서 이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가 중요한 이야기로서의 게임이 있다. 이러한 게임들은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텍스트들처럼,  플레이어가 맡게 되는 역할이 어떤 인물이고 그가 어떤 세상에서 어떤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는지가 중요해진다.


  그러나 게임이 그와 마찬가지로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는 문학이나 영화와 숙명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자나 관객과 달리 플레이어가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게임 속의 이야기는 플레이어가 이야기에 참여함으로써 서사가 진행된다. 어떤 게임에서는 심지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나 그가 겪게 되는 사건의 내용, 서사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오픈월드’식 게임이 각광을 받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야기 속에서의 ‘자유도’야말로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유도가 높은 게임에서 자연스럽게 중요해지는 요소가 있는데,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른 인물들, 즉 NPC(Non-Playable Character)다. 플레이어가 맡은 역할은 게임 속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역할들의 관계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 전운이 감도는 그리스 전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NPC들에 의해 ‘미스티오스’일 수 있었고, 대재앙으로부터 살아남아 100년 전의 전설을 기억하는 NPC들에 의해 ‘링크’일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개발자가 미리 입력해둔 값에 따라 대사와 반응을 출력하는 것에 불과할 뿐일지라도, 그 상호작용에 의해 플레이어는 비로소 게임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게임 속 인물이 아닌 플레이어 스스로로서 존재하는 현실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실에서는 플레이어임과 동시에 NPC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사의 주인공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서사에서는 늘 주변인물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라는 역할을 플레이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해 나간다. 동시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의 역할과 모습을 찾아 나간다. 그러고보니 그것이 누가 되었든 어떤 역할은 결코 다른 사람이 플레이할 수 없다는 사실은 NPC의 뜻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이 플레이어 겸 NPC들의 다양함에 의해 우리의 세계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서, 그렇기 때문에 게임 속의 세계가 더욱 현실과 가까운 모습을 구현해내려 할수록 NPC의 만듦새가 그 세계의 완성도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가면서 현실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반응, 행동양식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에는 그런 과정을 거쳐 더욱 복잡한 반응과 행동을 보여주는 NPC들이 등장하는 게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게임을 하다보면 내가 플레이하고 있는 역할보다 그가 만나는 NPC들이 오히려 현실의 우리들과 더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게임 안의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그 세계를 다시 찾게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조만간에 하게 될 게임에서 나는 ‘V’(5)가 될 예정이다. V로 지내면서 겪게 될 이야기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을 NPC들을 만날 생각에 플레이가 기다려진다.



(1) UBISOFT, <어새신 크리드 : 오디세이(Assassin's Creed: Odyssey)>, 2018

(2) KOJIMA PRODUCTION, <데스 스트랜딩(Death Stranding)>, 2019

(3) Nintendo, <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The Legend of Zelda: Breath of the Wild)>, 2017 

(4) CD Project RED, <더 위처3 : 와일드 헌트(THE WITCHER 3: Wild Hunt>, 2015

(5) CD Project RED,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 2020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묻는 글 / 박브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