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업(盞業) - 퇴사

직장다반사 - 모놀로그

by Save Point

어어, 박과장 어서와.


앉아, 앉아.


일단 한 잔 받아야지?


자, 일단 빈속에 한 잔 넘기고.


크으으으-.


서운해 이 사람아, 서운하다고.


그런 일을 나랑 얘기 한 번을 안할 수 있어.


죄송이 아니라 서운해서 그래, 서운해서.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내가 자네 퇴사 소식을 시스템으로 통보받으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을 해 봤나.


막말로 내가 자네 나간다고 심술을 부리겠어 불이익을 주겠어. 그런 생각이 들거나 상황이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줘야 뭔가 조언을 하던지 도와주던지 하지.


그래. 퇴직원 올리니까 속은 후련해?


시원섭섭? 뭐, 그것도 나쁜건 아닌데.


어디로 가?


S사? 좋은 곳에 가네. 축하해.


간다는 마당에 초치려는 건 아닌데, 신중하게 고민한 건 맞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기적으로 자네만 고려한 결과냐는 말이야.


잘 모르다니 이사람아. 이직이 보통 일인가. 내 오늘은 꼰대같은 소리도 좀 해야겠어.


표정을 보니 이해가 잘 안되는 모양이네. 자네 지금 여기서 제법 인정 받고 있잖아. 누구라도 자네 얘기나오면 잘한다고 하고. 이것좀 이렇게 바꿔 보겠습니다- 라고 하면 누구 하나 토를 달기를 하나. 여기서 날개 달고 있지 않은가.


근데 거기 가면 다를거야. 거기가면 굴러온 돌 이라구. 처음엔 여기 저기 제법 눈치도 보면서 분위기 파악도 해야 하고, 또 너무 잘해도 미운털 박혀. 그리고 시쳇말로 라인도 좀 타야지. 라인을 타도 공채냐 경력직이냐로 한계치가 정해져 있기도 하니까.


진골 성골? 이 사람아 여차하면 6두품이야.


물론 S사 좋은 회사야. 근데 우리 회사도 나쁜 회사는 아니잖아. 저런 상황까지 감안했을 때 자네가 가려고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충족되는가 싶어서 물어보는거야.


스스로가 뜻과 의지를 가지고 가는게 아니라면. 남들 때문에, 아니면 그냥 별 생각없이 갔다가는 괜히 왔다는 후회가 남을 수 있단 말이야. 월급 조금 오른것보단 다른 단점들이 더욱 크게 보일테니까.


그때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정말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오로지 나를 위한 선택인가 하는 것이야. 어영부영 이 회사 좀 다녀봤으니 옮겨볼까 하는 마음이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그렇게 후회하는 사람들을 제법 봤거든.


나? 나도 비슷한 이유였던것 같아. 오라는 곳도 있었고, 내가 지원하기도 했지. 근데 항상 마지막에 생각해보면 앞서 말했던 그런 부분들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어. 그 걱정을 못 넘었던 것 같아. 두려웠다고 해도 좋고, 안주했다고 해도 좋아.


그런데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후회하고 있냐고 물으면 그건 절대 아니거든.


내가 자네 남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오히려 내가 가지 못했으니까 나 대신에 갔으면 하는 대리만족 같은것도 있어.


다만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치열하게 자네만 고민한 결과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고민을 다시 한 번 해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얘기하는 것 뿐이야.


어느 선택이던 미련을 남기면 안되니까.


그래. 자.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퇴사 버튼 누른다고 얼마나 떨렸겠어. 게다가 여기가 첫 직장이잖아.


한잔 해. 건배.






정든 첫 직장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날, 선배님들로부터 수많은 조언과 소주를 동시에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 더 큰 세상으로 나가라!" 라는 응원과

"여기서 이미 충분히 인정 받고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하느냐"는 걱정이 뒤섞인 조언 사이에서 저는 꽤나 마음이 갈팡질팡했습니다.


어떤 선택인들 후회가 없었을까요.

다만 스스로를 위해 고민했던 시간들이 지금의 저를 지탱해줬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목이 잔업(盞業)이라 맨 정신에 쓸 수 없어 한 잔 걸치고 쓰니 기분이 꽤나 좋습니다.


못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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