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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Dec 22. 2020

'나만이 없는 거리'로 본 아동학대 -3

불편하다고 고개를 돌리면 결국 해결하지 못한다



세 번째는 카요가 썼던 산문이다.


“지금보다 훨씬 커져서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면, 먼 나라에 가보고 싶다. 먼 섬에 가보고 싶다. 아무도 없는 섬에 가보고 싶다.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없는, 그런 섬에 가보고 싶다. 섬에는 어른도, 아이도, 반 친구들도, 선생님도, 엄마도 없다. 그 섬에서 나는 올라가고 싶을 때 나무에 올라가고, 헤엄치고 싶을 때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고 싶을 때 잠을 잔다. 그 섬에서 나는 나만이 없는 거리를 생각한다. 아이는 평소처럼 학교에 간다. 어른은 평소처럼 회사에 간다. 엄마는 평소처럼 밥을 먹는다. 나는 나만이 없는 거리를 생각하면, 기분이 가벼워진다. 멀리 멀리 가고 싶다.”




나만이 없는 거리에서 카요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카요의 이야기가 완결되었던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나머지 이야기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였다. 작가인 산베 케이가 만들어 낸, 아동 살해를 결행한 사이코패스의 존재는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는지 모르나, 내게는 오히려 주제 전달을 방해 하는 요소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카요의 세계에서 진정한 적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살해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날을 거듭할 수록 폭력의 정도가 진화하는 친모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은 친모의 폭력으로 하루 하루 고문당해 죽어가고 있었으며, 강도는 높았지만 단 한번으로 끝난 사이코패스의 폭력과 달리 그것은 형태를 바꾸어 계속되었고 끝을 몰랐다. 


그러나 가족과 대립한다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래도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었을까?  산베 케이는 적을 외부로(가족->외부인인 선생님) 돌리는 ‘꼼수’를 썼다. 상업작가로서는 현실적이고 영리한 선택이었겠지. 불편한 이야기가 감내되는 영역은 문학이지 상업지가 아니다.


이 점이 불만이다. 불편한 소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학대와 갈등 사이의 구별을 잘 하지 못한다. 가족 간의 단순한 다툼이나 갈등, 그로 인한 죄책감이나 마음의 앙금은 학대와 엄연히 다른데도, 놀랍게도, 두 가지를 헷갈려한다.  그래서 학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죄책감으로 울고, 실컷 학대를 저지른 사람들은 ‘네 상처는 학대로 인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라고 피해자를 설득하는 황당한 일이 거듭된다. 


사회는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사회에는 큰 병변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아프지 않다고 주문을 외거나 대체의학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다. 거기에 병변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메디컬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이 있다. 날카로운 것에 깊게 찔렸는데 잘못되어서 손이나 발을 잘라내야 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것과 비슷하다. 별 것 아니라고 내버려두거나 괜찮을 것이라고 방치하다가 전체 몸에 악영향을 끼치고, 목숨마저 잃게 된다. 나는 아동학대야 말로 우리 사회가 점점 각박해지고, 자살률이 높아지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폭력이 해결방법인 줄 알게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탈바꿈하여 어렸을 때 당한 울분을 약자를 향해 풀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하는 사회문제로 번지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아동학대를 단순히 찔린 상처라고 여겨 내버려두는 사이, 이 상처는 곪은 채로 독성을 뿜어내며 우리 사회 전체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에 대해 통계적 자료를 제시하면서 건조하면서도 냉철한 어조로 이와 같은 문제의 척결을 주장했던 최근 책 중 하나가 ‘이상한 정상가족’이었다.


내가 포함되어 있던 가족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정상가족’이었다. 모자 가정도 조손 가정도 이혼 가정도 아닌, 외부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던 적절한 나이차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아이, 정상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4인 가족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안에서 그들이 나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일어난 일은 축소되었으며, 법적 해결이 아닌 가족 내에서의 해결로 짐을 떠넘기는 악순환으로 문제 해결이 지연되었다. 


학교에서도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는 어렸기 때문에 내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나의 부모는 나를 사람이 아닌 사람과 소유물 그 사이의 무언가로 취급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나라는 인격적인 개체를 학대하면서도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들의 잘못을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개인이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개인 그 자체로만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을 가이드했던 주춧돌 중 하나는 사회에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독한 병변이었으나, 혼자 태어나고 혼자 자란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틔움 받은 씨앗에 다시 사회에서 물과 거름을 받아 커져 나간 결과였다는 점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카요의 산문은 ‘이상한 정상가족’이 주장한 바와도 연결고리가 있다. 나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옳은 거리라는 인식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어머니도 옳고, 학교도 옳고, 사회도 옳고 나만이 틀리다는 인식. 왜 단순히 어머니와 멀리 떨어진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회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소망하는 글을 적었던 것일까?


그 누구도 혼자서 나고 자라고 생활할 수 없는 것처럼, 가해자 역시 사회의 영향을 받는 면이 크다. 그리고 그들을 초창기에 저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을 솎아내는 시스템이나 토양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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