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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Mar 06. 2021

난 그런 이야기 듣기 싫어2

허언증과 화목한 집의 아이들

그건 아동학대 생존자의 수기를 읽고 소감을 나누는 서평 모임이었다.


나는 그 모임에 꽤 오랫동안 다녔다. 햇수로 따지면 10년 정도. 물론, 중간에 유럽을 방황하며 통장을 텅장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참여 기간은 그만큼은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누군가를 알고 지내면, 설령 그들과 진하게 친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그들의 색깔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표면에 떠오른 부분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온 주제와 그 주제를 바탕으로 나누는 의견들에서, 그래도 남을 이용해 먹는 걸 삶의 즐거움으로 삼는 (내 부모같은) 소시오패스라던가, 현학성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꼬신 다음 어떻게 요리할지를 구상하는 사람들로 가득차있다던가 하지는 않다는, 그러니까 비교적 평화롭고 이윤을 덜 추구하는 양심적인 ‘집단’(개인은 모르겠다.)에 속한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그랬기에 그날 내가 들은 말들은 조금 충격이었다.


주제책은 아동학대 생존자의 에세이였다. 고통을 남김없이 쓴 게 아니고 약간 순화하여 문학적인 면모를 약간 갖춘, 순수한 에세이와 소설의 중간 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버지가 어떻게 딸에게, 사랑하는 딸에게 그럴 수 있어? 저자가 해당 사건을 과대인식한 게 틀림없어. 난 말이야, 내가 쓴 내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해. 주관적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상대방이 아무리 잘 해줬어도, 잘못한 부분만 기억하게 되어있잖아. 그러니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딸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란 말이지.”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가늠하고자 했다. 혼란했다.


“얼마 전에 우리 모임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그린 <살아남은 아이>를 읽었잖아? 난 그건 아주 잘 와닿았어.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분노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 책은 일단 신뢰가 가지 않아.”


그는 책을 던지듯 놓았다. 


살아남은 아이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그린 책이다. 1987년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시설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불법감금·폭행·강제노역 등 인권침해가 기관의 주된 기능이었고, 운영한 12년간 513명의 사망자가 나왔던 끔찍한 과거가 있는 곳이다. 이 책을 쓴 저자 중 한 명인 한종선씨는 “마음이 아프다고 오만상을 써가면서 이야기하면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 얘기 잘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이왕 얘기하는 거 듣고 싶게, 재미있게 하자고 생각해왔다.”라고 한겨레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잘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에 주목했다. 형제복지원 사건 역시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사건은 믿겠지만 아동학대를 당한 개인은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맥락이 같은 사건 중 하나는 믿고 하나는 못 믿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지금 아동학대 사건을 그린 책을 믿을 수 없다는 당신은, 과거에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그냥 믿기 싫은 것일까? 그만큼 정상 가족 신화에 세뇌된 정도가, 명료한 사실을 들이밀어도 믿지 못할 만큼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뜻일까?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동조였다.


“기억은 재구성되고, 다시 쓰이는 것, 즉 완벽하지 않다. 나 역시 동의한다. 아버지가 과연 사랑하는 아이를 상대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딸이 있는데, 그 애를 보면 무한한 애정이 솟는다. 이건 딸 입장에서만 쓴, 편파적인, 잘못된 기억임에 틀림없다. 아버지 말도 들어봐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이런 사고를 당했고, 청년기에는 전쟁 피해를 당했다. 그래서 그 부작용으로 아이에게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아이가 알아보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다음 타자가 말을 받았다.


“나는 이 책에 공감이 잘 가지 않았어. 소설은 아무리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악랄한 부분만 그리진 않거든.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는 부분,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같은 게 나와서 날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게끔 기능하는데, 이 책은 그게 없어. 여기 나오는 아버지는 그냥 악마야. 너무 하는 짓이 저질스럽고 혐오스러워서, 나와 아버지의 관계, 혹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여지조차 사라져있어. 그냥 나쁜 놈, 끝. 그래서 재미가 없어.”


책을 사랑하고, 소외계층에도 관심 많고, 남을 상처 입히지 않게 강한 어조로 말하지도 않고, 성숙한 토론을 이어오던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버지에 영혼을 파괴당한 아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이해와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모임이 열린 세 시간 내내 들은 것은 ‘와닿지 않는다’,’못 믿겠다’, ‘과장인 것 같다.’,‘아버지에게 일말의 공감과 동정이 간다’였다.


심지어 그중에는 상처받은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고자 여정을 시작했다는 ‘미술치료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한 명은 예외였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해 본 경험이 있다면서, 아동학대 생존자의 고백을 신뢰함은 물론 생존자 입장에서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줬다.)


나는 아동학대나 성폭력 생존자의 수기를 읽는, 해당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모임에서의 반응과 이들 ‘일반’인들의 반응이 확연히 갈리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슬픔은 처음에는 울림이 작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점차 커졌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조금 손을 떨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강이 흐른다. 그 강을 기준으로 두 부류의 사람이 나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밤이었다.





하지만 좋은 점은 있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와 절교한 사람이나, ‘부모에게 용서를 빌라’고 해서 내 분노를 샀던, 내 이십대에 만났던 사람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그들은, 여기 서평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았다. 나쁘거나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거나 공감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감당하거나 해석할 능력이 없었다.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라며 돌아서야만 했다. 


또 하나는 나의 능력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능력. 그래, 나는 이것을 능력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설령 세상이 커다란 클랙슨 소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귀가 항상 다른 사람보다 시끄러움을 감내하다 못해 아프고, 그 소리를 막기 위해서 귀마개를 하고 다니는 불편이 있다고 해도, 청력이 뛰어난 것이 장점이듯이. 


검수리는 2km 떨어진 곳에서 풀을 뜯고 있는 토끼를 똑똑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검수리가 아닌 새가 같은 방향을 아무리 쳐다봐도 그곳은 흐릿한 형태가 있을 뿐으로, 아무것도 없다면서 돌아설 것이다. 내게 저 고통이 진실한 지에 대한 안테나가 있다는 것이 검수리처럼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와 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는 시력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뻔히 목격하고도 ‘없다’고 하지만, 난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혐오스럽고 저질스럽고 악랄한 부모는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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