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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Nov 08. 2023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엄마

판도라의 상자

딸아이는 요즘 나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조른다. 동화를 읽어주면 시큰둥하고, 유튜브를 들려주는 건 너무 성의 없어 보여 내 어릴 적 굴욕 사건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엄마가 어릴 적 말이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버튼만 누르면 산해진미가 짠! 하고 나오는 전자레인지 CF를 본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삼계탕'버튼을 누르면 삼계탕이, '해물찜' 버튼을 누르면 해물찜이 나온다. 세상에! 전자레인지는 마법의 요리상자구나!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전자레인지 사달라고 조른다. 


"아니, 어린 얘가 무슨 전자레인지를 사달라고 졸라?"


며칠간 조르는 내가 귀찮다는 듯, 마침 필요했으니 사도 되겠다는 표정으로 외할머니는 전자레인지를 구매했고, 결과는 참혹스러웠다. 삼계탕, 해물찜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문을 열면 텅 빈 전자레인지를 바라보며,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외할머니가 불량 전자레인지를 산 것 같아."


이모를 통해 CF에 가려진 전자레인지의 진실에 대해 듣고 엄마는 2박 3일을 펑펑 울었다. 그 물건을 갖게 된 날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와 전자레인지의 진실을 들은 날 내가 얼마나 우울했는지에 대해 딸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딸.


내 과거 이야기는 전래동화 뺨치는 서사로 탈바꿈해 아이의 배꼽을 잡게 했다. 그 밖에도 우연히 얻은 특이한 OHP필름박스를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학교에 책가방도 안 챙겨간 사연, 돈 심으면 돈 나는 줄 알고 화단에 부지런히 돈 심은 사연... 등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한 번은 웃기는 이야기를 하려다 의도치 않게 아이를 울리고 말았다. 이야기인즉 어릴 적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고 놀렸는데 "정말로, 진짜야?" 물으니 "응, 진짜야."라는 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사연. 그다음에 이어질 스토리는 "외할머니의 그 말에 엄마는 어두운 방에서 한 시간 동안 펑펑 울었다"인데, 내 슬픔을 표현도 하기 전부터 녀석의 몸이 얼음장같이 굳더니 눈시울이 빨개지고 급기야 안구에 가득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 손을 내 어깨에 올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괜찮아, 내가 있잖아.”




세상에. 


이 작은 것으로부터 내가 이렇게 큰 위로를 받아도 되는 걸까. 나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고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 지금 엄마가 슬플까 봐 우는 거니?"라고 물었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린 내가 느꼈을 슬픔을 순간 오롯이 온몸으로 떠안은 나의 딸. 아이가 엄마 다리 사이에서 나오니까 '다리 밑에서 주웠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의학적인 설명을 시작하기도 전에 녀석은 나를 위로했다. 이야기 시작 0.5초 만에 눈물샘이 터지다니, 내가 공감능력 하나는 대한민국 0.1% 인 딸을 낳았구나. 이 녀석 대체 뭐가 되려고 이렇게 사랑스럽지.



침대에 누우면 또 엄마 이야기를 조를 딸에게 오늘은 또 어떤 흑역사를 꺼내 풀어야 할지 고민스럽다. 이렇게 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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