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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Oct 11. 2024

매일 선물이 기다리고 있어

제니의 꿈

제니는 노트북을 켜고 아이클라우드에서 오늘 촬영한 영상들을 불러왔다. 45분간 촬영한 영상을 5분 이내로 압축하기 위한 세리머니를 시작한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 한 캔을 따고 벌컥, 벌컥, 벌컥 세 모금을 한 번에 들이켰다. "캬... 크억."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트림에 놀라 귀엽게 웃으니 보조개가 깊이 파였다. 두툼한 뿔테 안경을 쓰고, 몸이 두 개는 더 들어갈 만한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고,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단단히 고정한 뒤 엄숙한 자세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흡사 오락실에서 한 판 붙을 기세가 달아오른 초등학생 같았다. 그 순간 누군가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제니, 지금 우리 카드게임할 건데, 같이 안 할래?"

"언니, 나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미안. 이따가 꼭 껴줘."

"라면도 먹을 건데, 그것도 이따가?"

"아니, 라면은 안 돼. 다이어트."

"얼마나 걸려?"

"최대한 빨리 해볼게. 오늘은 45분, 도전!"


오른손을 불끈 쥔 제니는 엄지 척을 하며 사라지는 룸메이트 지호를 보며 찡긋 웃었다. 두 달 전 4주간의 홈스테이를 마치고 시티에서 살 방을 구했을 때, 레지스 타워 세컨드룸에는 제니보다 한 살 많은 유학생 지호가 살고 있었다. 침대 두 개, 책상 두 개, 행거 두 개가 전부인 네 평 남짓한 방에서 지호와 제니는 가족보다 끈끈한 사이가 됐다. 서른여섯 평의 집에는 마스터룸과 두 개의 세컨드룸이 있는데, 한국인 셰프 부부가 이 집을 렌트해 마스터룸을 쓰고,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서 온 시즈코 커플, 그리고 지호와 제니가 각각 세컨드룸에서 지내고 있었다. 으레 금요일 밤이면 다 같이 둘러앉아 카드게임을 하거나 한국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셰프 부부가 뽐내는 요리로 야식을 즐겼다. 제니는 본방 사수하듯 '해피 프라이데이 나잇'을 기다렸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갑(甲) 자기 사장님!>이 방영된 이후 제니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수가 9만 명을 넘어섰다. 그녀의 채널이 이렇게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시드니전집 손님들과 영어로 대화 나누는 장면을 편집한 브이로그 덕분이다.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일일 조회수가 100회를 겨우 넘었던 영상들이 <갑(甲) 자기 사장님!>  방송 이후로 10만 회를 넘어섰고, 영상을 더 자주 올려달라는 구독자의 댓글알람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탄탄한 채널로 성공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많은 영상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녀가 시드니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밤마다 지호와 함께 손님-직원 상황극을 벌였다. 회화실력이 수준급인 지호는 영어실력이 부족한 제니에게 손님이 요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를 시뮬레이션하며 영어표현을 가르쳤다. 


"Can I have 육전 for take away?(육전 포장 될까요?)"

"Sure, How many?(그럼요, 몇 개 포장해 드릴까요?)"

"Four, Please.(4개 주세요)"

"If you buy 4, You can get $4 off(4개를 사시면 $4를 할인해 드려요.)"

"Awesome! Thank you.(최고네요. 감사합니다.)"


전과 함께 음료를 구입하면 50센트를 할인해 주고, 전을 4개 이상 포장하면 4달러를 할인해 주는 상황극을 매일 같이 연습했다. 지호는 그녀가 가르친 표현들을 제니가 실전에서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제니에게 영상을 찍어 오라는 숙제를 냈다. 제니는 사장인 주이의 동의를 구해 촬영을 시작했다. 계산대 앞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세워두고 자신의 얼굴만 나오도록 한 다음 전날 지호와 연습한 표현들을 집중적으로 말했다.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던 지호는 깜짝 놀랐다. 일주일 만에 제니의 영어 실력이 부쩍 향상한 것이다.


"쩬! 너 이 억양 너무 섹시한데? 이거 유튜브에 올려도 되겠다."

"아후, 언니 이렇게 못하는 걸 어떻게 유튜브에 올려. 내 시드니 브이로그에 망신이야. 나중에 잘하게 되면 몰라도 지금은 너무 부끄러운데."

"무슨 소리야, 못하는데 잘하게 됐으니까 그런 걸 올려야지. 쩬, 이제는 좀 다르게 해 봐."

"다르게?"


제니는 지호의 말이 낯설지 않았다. 그날 오후 꿈이 뭐냐고 묻는 사장님에게 자신의 꿈이 유튜버인데 구독자가 늘지 않아 고민이라고 답했을 때, 사장님이 했던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르게 해 보라는 말' 제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촬영한 영상 중 지호에게 칭찬받은 영상을 골라 간단히 편집해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쉬운 영어 표현이라 자막도 넣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다음 날 하루아침에 구독자가 100명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세 달이 넘도록 안 늘던 구독자가 하루 만에 100명이라니, 제니는 믿을 수 없었다. 신이 난 그녀는 그동안 찍어 둔 영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편집해 올렸다. 유튜브에 올릴 생각을 하니, 영상의 컨셉을 의식해 전보다 더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했고 한 번씩 농담도 섞어했다. 그 덕에 단골손님도 생기고 단골메뉴도 암기했으며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종갓집의 막내로 자란 제니는 늘 시끌벅적한 가족을 떠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1년이면 제사를 열 번도 더 지내는 대가족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학 밖에 없었다. 하지만 5남매 중 막내인 제니에게 부모님이 수 천만 원을 유학자금으로 내줄 리 만무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친 제니가 휴학 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가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제니의 엄마는 "이제 전은 누가 부치니?"였다. 지긋지긋한 제사노동에서 벗어나 제니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유튜버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시드니 일상이 전부였던 <Jenny's 시드니로그> 채널은 자막이 딸린 손님-직원의 매력적인 대화 영상들로 채워졌고 마침내 <갑(甲) 자기 사장님!>의 섭외 레이더 안에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제니의 엄마 김여사는 전 부치는 게 싫어 호주로 떠난 막내딸이 전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전 부치는 게 싫어서 호주로 떠났다면서. 시드니 전집?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나 거기서 전 안 부치거든?"

"전집에서 전을 안 부친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전은 안 부치는 조건으로 거기서 일하는 거야."

"어이가 없다. 전집에서 일할 거면 빨리 한국 들어와!"

"싫어! 나 여기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호주까지 가서 전집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이 못마땅한 김여사는 한시바삐 귀국을 권했지만 제니는 이제야 자신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며, 엄마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고 말했다. 실제로 제니는 한 어학전문 앱 회사로부터 광고 제안까지 받은 상태였다. 친절하게 영어자막까지 제공되는 손님-직원 대화 영상은 딱딱한 영어회화 영상보다 구체적이고 실감 났기 때문에 회화 공부에 관심이 많은 구독자들에게 크나큰 동기부여가 됐다.

 

"이거 중독성 있는데요? 제니 님 목소리 짱 좋아요."

"호주에선 손님들이 진짜 친절하네요. 제가 일하는 카페는 저런 손님 없는데..."

"와, 진짜 시드니 전집 저도 꼭 가볼 거예요."

"제니 님, All good? 이 표현, 입에 착 붙어요."

"이런 아르바이트라면 당장 하고 싶어요."

"이 영상 100번 돌려 보면서 영어공부 중이에요. 더 많이 올려주세요. 제발..."


수많은 댓글이 제니의 다음 게시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라이데이 나잇 이벤트보다 더 중요한 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일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오늘 촬영한 영상을 편집했다. 배경음악을 검색하며 콧노래가 나왔다. 비트에 맞게 고개와 어깨를 흔들었다. 촬영할 생각에 시드니 전집 출근이 기다려졌다. 제니에게 매일매일이 선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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