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lla화법? 그게 뭔데요?
장류진의 소설 <달까지 가자>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흙수저 여성 3인방의 아찔한 코인열차 탑승기로,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어 가상화폐 가격이 치솟을 때마다 환희가 차올라 흥분하며 읽었던 책이다. ‘달까지 가자’라는 제목은 가상화폐의 끝없는 상승을 염원함과 동시에 어디까지 상승하는지,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아슬아슬한 의미로 풀이된다.
시드니에 전집을 차린 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갑(甲) 자기 사장님!> 프로그램 방영 이후 최재수는 역대 출연자 중 가장 많은 클로버를 받았다. 그 덕에 로코퀸 이민아와 주말 연속극의 조연을 떡하니 맡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가세가 기울어 온갖 고초를 겪다가 새침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여자를 만나 행복을 찾는 남자 배역이 최재수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뤘다. <유 퀴즈>에 출연한 최재수는 시드니전집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고 특히 그의 재기를 도운 일등 조력자로서 주이를 칭찬했다. 주이는 ‘따뜻한 면모의 사업가이자 상담가’로 묘사됐고 자연스레 시드니전집과 주이는 최재수의 후광에 힘입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시드니전집 인스타그램 계정은 일주일 사이에 팔로워 10만 명을 달성했고, 시드니전집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속출했다. 대체 방송 속 주이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진 것일까?
하영석 PD의 의도는 이랬다. 최재수가 재기할 기회를 얻으려면 그가 민간인부터 다시 시작하는 설정이 필요했다.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지나 여유가 넘치는 시티 한복판에 위치한 시드니 전집에 최재수가 등장한다. 최재수가 할 일은 사장인 주이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겸손한 태도로 그녀에게 동정을 얻어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최재수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청자들은 사장인 주이에게 감정 이입을 시작한다. 방송 내내 최재수를 배려하고 세심하게 챙기는 주이의 몸짓 하나하나를 보여준다. 서툴던 최재수가 차근차근 제 몫을 해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주이의 마음이 시청자의 마음에 투영된다. 최재수는 본인이 가진 매력을 최선을 다해 뽐냈다. 여전히 훈훈한 눈웃음과 사연 있어 보이는 눈빛, 외국인에게 뒤지지 않는 훤칠한 키와 외모까지, 2회가 마무리될 무렵 시드니전집의 최재수는 이미 스타가 돼 있었다. 하 PD의 의도는 완벽하게 적중했다. 시청자들은 최재수는 물론 사장인 주이의 매력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주이를 스타로 만든 것은 최재수와 대화 장면을 편집한 영상이었다. 최재수가 주이에게 드러낸 사심은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사레들린 주이를 위해 서둘러 물을 가지러 가다가 밀가루를 바닥에 흘리는 허술한 모습, 손님을 응대하는 주이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나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주이를 지켜보는 겸손한 표정, 손이 데었을 때 야단법석하며 구급함을 찾는 모습. 영업 중간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척하며 패디스마켓에서 주이가 좋아하는 납작 복숭아를 사 오는 소탈한 그의 모습이 등장했다. 주이는 5일간 촬영한 영상을 의도에 맞게 편집한 제작진들이 흡사 마술사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멜로드라마 배역에 걸맞은 최재수의 로맨틱한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주이를 간접적으로 이용한 하 PD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최재수가 주이에게 호감을 느꼈을 테고, 하 PD는 촬영 첫날 최재수의 목을 조르며 주이와의 관계를 경고했을 거라 그녀는 짐작했다.
주이가 학창 시절 최재수의 팬이었으며, 힘든 시간을 보낸 최재수를 변함없이 지지한다는 그녀의 인터뷰는 주이 또래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고 하 PD의 전략에 마중물이 됐다. 그 공감이 최재수를 향해 보낸 클로버로 이어진 것이다. 실시간 시청자들이 보낸 클로버 수는 20만 명이 넘었고, 그 자리에서 주말 연속극 주연 및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확정됐다. 이로서 주이는 최재수의 재기를 도운 일등공신이 됐다.
주이의 리액션은 SNS에서 짧게 편집돼 밈(인터넷에서 전파되는 유행이나 창작물)으로 전파 됐다. 최재수가 "제가 솔직히 그때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거든요."라고 이야기할 때 주이가 "그런 상황에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한다거나, 그가 힘든 시기를 보낸 경험을 말하며 울컥할 때 "힘내세요." 같은 응원보다 주이가 눈물을 글썽인 것, 최재수가 “쿠팡맨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은 할 것 같은데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더워도 마스크를 썼어요“라고 서글픈 표정을 지었을 때 주이는 "아니 왜, 제일 잘 생긴 쿠팡맨이 됐으니 쿠팡에 인센티브 요구하셔야죠, 마스크가 웬 말?"이라고 응수하며 그를 웃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가를 초빙해 공감의 심리학 이론까지 거론하며 주이의 공감능력을 추켜세웠다. 최재수는 인터뷰에서 사장인 주이와의 솔직한 대화 덕분에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따뜻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제작진이 만들어 낸 '최재수 흥행' 프레임이 절정에 달했다.
"좀 부끄럽다... TV프로그램은 참 별것 아닌 걸로 유행을 만드네. 언니야, 그치?“
“네가 평소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해! 어쨌거나 너에겐 잘 된 일이지. 내 동생이 TV스타가 됐잖아!"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유명해져서 부캐(평소의 내가 아닌 게임이나 모임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캐릭터, 성향)가 생긴 것 같아. 본캐(원래의 내 캐릭터, 성향)가 들키면 무지 창피할 텐데... 아휴... "
“네 본캐가 어때서? 난 어딜 가도 내 동생 자랑하는걸? 내 동생 장점을 알아봐 준 제작진에게 감사해야지. 근데 이참에 네 장점을 적극적으로 살려보는 건 어때? 유튜브를 한다거나 책을 써보는 건?“
“나한테 그런 능력이 어딨어,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주이는 문득 몸에 안 맞는 꽉 끼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온 그녀인데 하루아침에 이런 관심을 받게 된 일이 어색하고 낯설어서 잠도 오지 않았다.
호주를 방문하는 유튜버들은 주이를 만나고 싶어 했다. 시드니전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셀카봉을 들고 라이브방송을 하는 인플루언서도 있었다. 잡지나 신문기사 인터뷰는 주이가 호주에 있기 때문에 줌이나 전화로 이루어지곤 했다. 한국에 언제 돌아올 건지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여기저기서 광고문의도 들어왔다. 주이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대답을 미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진혁은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며 서둘러 2호점, 3호점도 내라고 부추겼다.
"사장님, 진짜 대단해요. 우리 이러다 대박 나서 달까지 가는 거 아니에요?"
"다 제니 덕분이야, 나 어떻게 이 빚을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근데, 어쩜 그렇게 날 감쪽같이 속여요?"
"에이, 사장님! 이제와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결국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잖아요? 사장님 덕분에 제 유튜브도 구독자 수가 십만 명 달성을 앞두고 있어요!"
"세상에! 그럼 이제 제니의 꿈을 이루는 거네요!"
제니는 구독자 수가 90명에서 9만 명으로 늘어 당당히 인플루언서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는 시드니 전집에서 일어나는 재밌는 에피소드를 당당하게 각색해 올릴 수 있었다. 맛있게 전 부치는 비법도 짧게 편집해 올렸고, 손님과 대화 나누는 장면은 영어 자막과 함께 올렸다. 주이는 크리에이터가 꿈인 제니의 통통 튀는 편집 능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녀가 최근에 올린 <갑(甲) 자기 사장님!> 촬영 비하인드 영상은 '좋아요'가 무려 100만 회를 넘어섰다. 제니의 유튜브를 보고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오고 싶다는 구독자가 많이 늘었다. 그녀는 틈틈이 라방(라이브방송)도 진행하고 맞춤형 상담도 하면서 경험을 많이 쌓고 싶다고 했다. 방송이 나간 지 2주 만에 주이와 제니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두 사람의 손에 여전히 뒤지개와 계란이 쥐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주이는 여전히 소고기에 밀가루를 묻혀 육전을 부치고 제니는 계란을 풀고 있다. 하루에 부칠 수 있는 전의 수는 한계가 있으니 크게 수입이 는 것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라곤 둘 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신이 났다는 것. 전을 부치는 주이의 손놀림이 가벼워졌고 제니는 계란을 풀며 콧노래를 불렀다. 기분 좋은 일은 구독자 수와 함께 매일매일 늘어났다. 부자가 되는 주이의 상상에 이런 그림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주이는 부자의 문턱에 서있는 사람 같았다.
연이은 사건들로 들뜬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주이의 앞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결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