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 자기 사장님
어제까지만 해도 주이와 제니가 전을 팔던 시드니 전집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른 아침부터 열댓 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장비를 들고 와 이곳저곳에 설치를 시작했다. 식당 안쪽으로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됐고, 식당 안팎으로 스태프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주이는 평소보다 빨리 가게에 나와 전을 부쳤지만 감독과 스태프의 지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나무 채반 위로 김치전과 해물파전, 육전이 수북하게 쌓였다. 카메라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주이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불편해 보이는 주이에게 감독이 티슈 한 장을 내밀었다.
"사장님, 그냥 자연스럽게,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돼요. 저희가 알아서 다 편집합니다."
"하... 그래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주이는 문득 요가선생님이 자연스럽게 호흡하라고 지시하면 숨소리와 박자를 억지로 의식하느라 오히려 숨이 가빠졌던 것이 생각났다.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하니 더 부자연스러웠다. 멋쩍은 주이는 제니에게 눈길을 돌렸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가볍게 몸을 맡긴 채 한 손으로 보울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란물을 풀고 있었다. 촬영 도중에도 젊은 스태프들과 농담을 주고받았고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2주 전.
"사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혹시 우리 전집에서 예능프로그램 같은 거 촬영해도 될까요?"
"예능프로그램? TV에 나오는 프로그램 말이에요?"
"네, 제가 유튜브 한다고 말씀드렸죠? 지난번에 사장님이 구독자 늘리려면 좀 다르게 해 보라고 하셔서, 제가 시드니 전집에서 찍었던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최근에는 리사랑 대화하는 장면, 사장님 전 부치시는 장면, 제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모습 같은 거 편집해서 올렸거든요. 제가 시드니 전집 홍보도 열심히 한 것도 아시죠? 재밌게 올리다 보니 저한테도 엄청난 기회가 왔어요. 제 유튜브를 본 방송국 PD님이 시드니 전집에서 예능프로그램을 찍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제니는 자기가 한 말을 증명하려는 듯 자신의 유튜브 채널과 KBS PD가 단 댓글을 주이에게 보여줬다. 제니가 내민 휴대폰을 받아 든 주이는 휴대폰 속 작은 글씨와 영상들을 찬찬히 내려봤다.
"어머, 정말이네요? 그 예능프로그램 이름이 뭔데요?"
"<갑(甲) 자기 사장님!>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갑자기 사장님? 잘 알죠. 요즘 그 프로그램 진짜 재밌게 보고 있는데, 세상에, 설마 그 프로그램 PD에게 연락이 온 거예요? 하영석 PD, 맞죠?"
최근 절찬리 방영 중인 예능프로그램 <갑(甲) 자기 사장님!>은 과거에 인기가 많았으나 뜻하지 않은 불운으로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은 연예인이 출연한다. 잊고 살았던 연예인을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난 시청자는 타임머신을 탄 듯 신기해했다. 프로그램의 주용 내용은 이런 식이다. 포장 전문점 사장님이 갑(甲)이 되고, 잊힌 연예인이 을(乙)이 되어 가게 운영 비법을 전수받는다. 이때 포장 전문점 사장님과 출연자가 ‘티키타카’하는 모습을 보고 입담 좋은 패널들이 시청 소감을 나누면, 그걸 본 시청자들은 출연자의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하고 프로그램 SNS에 '응원해요 클로버'를 눌러준다. 클로버를 많이 받은 출연자는 네잎클로버 수에 따라 순차적으로 아침드라마, 평일드라마, 주말드라마, 인기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함으로써 재기의 기회를 획득한다. 클로버를 많이 받으면 유명 제작사로부터 절호의 캐스팅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시청자가 밀어주는 참여형 프로그램'인 셈이다.
숨은 맛집 발굴에 홍보까지 해주니, 소상공인에게 환영받는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었다. 시드니 전집을 차린 후 주이는 '우리 가게에도 한 번 와주면 좋겠다.'라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는데 난데없이 제니가 이런 제안을 받은 것이다.
"저도 이런 연락은 처음이라 깜짝 놀랐어요."
"혹시 신종 사기꾼 아니에요? 요즘 유학생 대상 신종 범죄가 유행이라잖아, 우리 부모님도 보이스피싱에 여러 번 노출됐었어요, 젊은 사람이 너무 잘 속는 거 아닌가?"
제니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이 방송국에 직접 전화를 걸어 신원 확인까지 마쳤다고 했다. 오히려 전집이 방송을 타면 유명해져서 손님도 늘 테니 결국 사장님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주이를 설득했다. 주이는 그런 제니의 표정을 보더니 실낱같은 의심을 갖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 PD님께 뭐라고 말했어요?"
"사장님께 일단 물어보겠다고 했어요. 사장님이 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고... 그런데 PD님은 만약 촬영에 협조만 해주면 일주일 치 매출에 맞먹는 비용은 물론 출연료도 주겠다고 하셨어요. 구체적인 건 사장님 동의하신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고요."
"흠... 일단 일주일치 수입을 책임져준다고 하니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고, 어떻게 협조하면 된대요?"
"출연자가 사장님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나하나 알려주시고, 하루 이틀 도움을 주시면 나머지 3일은 저랑 같이 가게를 운영하셔야 한대요. 이번에 출연하는 배우이름이 뭐라더라... 최재수라고, 예전에는 진짜 유명한 사람이었다던데, 혹시 사장님은 아세요?”
최재수?
최재수라..
최재수!
주이는 제니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재수는 주이가 중학교 때 즐겨보던 하이틴 드라마 조연배우로 데뷔해, 광고모델이나 영화배우로 장르 가릴 것 없이 큰 인기를 누리다가 마약 혐의로 순식간에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춘 배우였다. 제니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니 그녀가 최재수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당시 그는 술에 취해 판단이 어려운 상태에서 친한 가수의 권유로 마약을 하게 됐는데, 다음 날 깨어나보니 함께 있던 친한 가수에게 원한을 품은 여배우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후문이 있었다. 쌍꺼풀 없는 눈웃음이 선량해 보였던 그가 마약이라니...
더 놀라운 것은 주이가 한때 최재수의 광팬이었다는 사실이다. 갈색 머리에 눈웃음이 귀여운 그는 사춘기 주이의 꿈에 단골로 등장했다. 당시 유행이던 쭈뼛한 헤어스타일과 웃을 때 깊이 파이는 보조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가 출연하는 하이틴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주이의 아빠가 뉴스로 채널을 바꾸면 그녀의 방에서는 곡소리가 났다. 용돈을 받기 무섭게 시내에 나가 그의 브로마이드를 사쟁였다. 더 웃긴 건 주이가 반에서 '최재수 와이프'로 통했다는 사실이다. '토니와이프'로 불리던 유정, '우혁와이프'로 불리던 지혜와 사이좋게 지낸 이유도 실제로 H.O.T. 의 토니와 우혁, 최재수가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반에서 최재수를 좋아하는 데 가장 많은 돈을 쓴 사람만이 '최재수 와이프'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브로마이드 몇 장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엄마 몰래 급식비와 교재비를 빼돌려 모은 돈은 주이가 '최재수 와이프' 타이틀을 유지하는 데 꾸준히 사용됐다. 최재수가 마약 혐의로 방송 정지를 당했을 때 주이는 방에 갇혀 식음을 전폐하고 와이프보다 극심한 열병을 치러야 했다. 주이의 엄마는 딸을 고통 속에 가둔 최재순가 뭔가 하는 놈의 흔적을 모조리 불태웠고, 주이는 성인도 되기 전에 혹독한 이혼의식(?)을 치렀다. 시간의 마법이 그렇듯 대학생이 되고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최재수는 주이의 추억앨범 속에서 잊혀 갔다.
최근 주이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최재수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25년 전 최고의 인기배우 최재수, 쿠팡맨으로 일하며 월세내고 있어요." 썸네일 속 최재수의 환한 눈웃음과 보조개 딸린 미소는 여전했지만 꽃중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이가 됐다. 마흔일곱의 그가 쿠팡맨이라니, 딱한 마음이 든 주이는 능력이 된다면 일자리라도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런 최재수가 시드니 전집의 사장이 되는 예능프로그램으로 재기를 준비한다니, 놀랍게도 그의 재기를 도울 칼자루를 주이가 쥐고 있다니, 손에서 땀이 났다.
“안녕하세요, 최재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폐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편하게 해 주세요.”
최재수와 인사를 나눌 때 주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열일곱의 주이는 마흔둘이 됐을 때 자신에게 이런 미래가 찾아올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주이 앞에서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를 보니 그녀는 만감이 교차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주이와 최재수를 주시하고 있다.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등에서 땀이 났다. 최재수는 공백이 길었다고는 하지만 역시나 배우는 배우였다. 떠는 기색 하나 없이 감독을 비롯한 스텝의 요구를 성실하게 따랐다. 작가가 미리 정한 상황설정과 대본도 잘 소화해 냈다. 이제 주이만 잘하면 될 일이었다. 촬영은 지체 없이 시작됐고 주이는 제일 먼저 육전 만드는 방법을 최재수에게 설명했다.
“보통은 밀가루를 그냥 쓰는데, 이렇게 밀가루를 채에 받쳐 곱게 만들어서 소고기에 묻히면 밀가루가 뭉치지 않아요. 그럼 전이 더 고소하고 식감이 좋아요."
“아, 그냥 계란만 묻히는 게 아니군요? 이걸 매번 직접 하시나요?”
“손님이 없을 때는 저 혼자서도 할 만 한데, 손님이 많아지면 힘드니까 결국 아르바이트생을 구했죠.”
주이는 슬쩍 제니를 쳐다봤다. 최재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주이를 향해 채를 달라는 손짓을 했다.
“주세요, 저도 한 번 해 볼게요.”
그는 주이가 했던 대로 흉내를 냈지만 밀가루가 채 바깥으로 튀면서 입고 있던 앞치마에도 밀가루가 튀었다. 그의 오른쪽에 선 주이는 본능적으로 최재수의 건강한 오른쪽 팔목을 지그시 눌렀다. 채를 탁탁 치는 그의 손목이 주이에게 경고를 받으니 움직임이 덜 해져 밀가루가 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최재수의 손목을 건드린 주이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멋쩍은 마음에 서둘러 칭찬을 퍼부었다.
”오, 제법인데요? 이제 잘하시네요. 아, 그리고 말씀드릴 게 있는데 전을 다 부치고 난 뒤 바로 손님에게 주는 것보다는 30초 정도 한 김 식혀서 내어주면 바삭하고 맛.....(콜록콜록) 있어요."
“아 목이 타세요? 여기, 물…”
주이는 너무 떨린 나머지 아직 진도도 안 나간 순서까지 당겨서 설명하느라 목이 바짝 타들어 결국 사레가 들렸다. 최재수는 밀가루를 거르던 채의 손잡이를 손에 쥔 채로 냉장고 속 생수병을 꺼내왔다. 그 바람에 채에 묻은 밀가루가 바닥 이곳저곳에 튀어 바닥은 금세 엉망이 됐다. 주이는 미리 준비한 대사들을 적시에 자연스럽게 꺼내지 못했고, 긴장한 탓에 발음이 샜으며 말이 빨라져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긍께... 이건 전라도 사투리죠? 사장님 그 말하실 때 엄청 귀여운 거 아세요?”
최재수는 감독과 사인을 주고받더니 전을 부치는 도중 주이의 전라도 사투리를 흉내 냈다. 주이는 사투리를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빨개진 얼굴이 카메라에 담겼을까 봐 민망해했다. 사투리를 안 쓰려고 노력할수록 억양은 더 이상해졌다. 주이는 할 수만 있다면 촬영을 멈추고 싶었다. 점점 가게 곳곳의 카메라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촬영을 허락한 이상 그만하고 싶다고 아이처럼 떼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독이 잠깐 쉬는 시간을 갖자고 신호를 보냈다. 최재수는 양팔을 위아래로 스트레칭하며 주이에게 다가갔다.
"촬영, 힘들죠?"
"네. 이게 TV로 보는 것만 쉽지, 촬영하는 건 너무 긴장되네요. 자꾸 실수해서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차라리 그냥 아는 오빠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세요."
주이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오빠라니... 얼마 만에 불러보는 '오빠'인가. 마음속으로 '재수오빠...'라 불러보고는 혼자 쿡쿡 웃었다. 학창 시절 주이가 '재수오빠'라고 발음할 때 친구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야, 재수오빠라고 부르는데 왜 재수 없다고 들리냐? 하하하.."
아직 역할이 크게 없는 제니가 포장해 온 아이스라테 한 잔을 주이에게 건넸다.
"사장님, 더우시죠? 제가 괜히 이걸 한다고 해서 너무 고생시켜 드리는 것 같아요. 드시고 힘내세요. 사장님 좋아하시는 오트밀크로 주문했어요."
"아, 가뭄에 단비 같은 커피네요. 고마워요. 나 너무 어색하죠? 방송 망칠까 봐 큰일이네요."
"아니에요, 잘하고 계세요. 사장님! 파이팅!"
양손을 꾹 쥐고 파이팅을 외치는 제니는 '최재수와이프'로 통하던 주이의 과거를 모른다.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약속한 3시에 촬영을 마친 하 PD는 아무래도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으니 내일까지 사장님과 촬영을 하는 게 좋겠다고 주이를 설득했다. 어차피 주이는 촬영 기간 내내 나올 생각이었으니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오늘 같이 어색한 촬영을 내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오후 여섯 시, 제작진과 출연진이 한인 정육점 사장인 현수가 운영하는 삼겹살 가게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맛있는 식당을 추천해 달라는 하 PD의 부탁에 주이가 제안한 곳이었다. 한국보다 맛있는 파채삼겹살을 맛본 제작진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하 PD와 최재수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제니와 주이가 앉았다. 허기진 배를 적당히 채운 최재수는 소주 한 잔을 따라 주이에게 내밀었다.
"사장님은 언제부터 시드니에서 사신 건가요?"
"저도 여기서 전집을 차린 건 이제 5개월 밖에 안 됐어요."
“오, 생각보다 길지는 않네요. 근데, 어쩌다 시드니에 전집을 차릴 생각을 하신 거예요?”
“사연이 좀 있어요. 제가 전이랑 시드니를 둘 다 좋아하거든요.”
“이야... 좋아하는 걸 둘 다 해 버린 사장님이 진짜 갑 맞네요.”
최재수는 방송 정지 이후 틈틈이 재기를 노렸다고 자신의 지난 과거를 털어놨다. 입담이 좋아 결혼식 사회나 행사 진행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왔지만,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와 비난이 두려워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긴장을 풀고 어른 대 어른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침내 취기가 오른 주이는 결국 감춰둔 비밀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근데... 저 실은, 중 2 때부터 배우님 팬이었어요.”
“네? 진짜로요?”
옆에 앉아 그 말을 듣던 제니가 깜짝 놀란 눈으로 주이를 쳐다봤다. 최재수는 막 쌈을 싸려던 야채를 앞접시에 도로 내려놓고 목이 탔는지 황급히 맥주를 찾았다.
“네, 고등학교 때 브로마이드 새로 나올 때마다 모으고, 배우님 나오는 드라마 본방 사수 못 하게 하면 부모님 앞에서 울고불고... 스프링 노트에 매일 팬레터 쓰느라 공부는 뒷전이었어요. 좋아하는 껌이랑, 비타민C 레모나 잔뜩 붙여서 팬노트 보내드린 적 있는데 혹시 기억 안 나세요?"
“어, 레모나! 와... 그걸 어떻게 잊나요. 아니, 그게 사장님이었다고요?"
최재수는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주이를 가리켰다. 호기심이 그득한 눈으로 신기한 듯 주이를 바라보는 최재수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어머,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네요. 전 그때 어떻게든 배우님 마음에 들고 싶어 그랬죠. 성공했군요. 다행이다."
"와, 이거 갑자기 기분 엄청 묘해지는데요?"
그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웃는 제니와, 잘 됐다는 표정으로 최재수를 쳐다보는 감독, 오랜만에 팬을 만나 기분이 째진 최재수, 그리고 끝내 비밀을 감추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해 혀가 풀린 주이가 서로 건배했다.
'이왕 고백한 거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주이의 혀 끝에 이 말이 맴돌았지만 다행히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그녀의 입술을 단단히 단속했다. 어렸을 때야 팬심이었다 해도 지금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나게 됐고, 지금 자신이 최재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주이가 시드니까지 와서 어릴 적 우상을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저녁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화장실에 다녀온 주이는 가게 밖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최재수와 눈이 마주쳤다. 짧지만 강렬한 어색함을 못 견딘 주이가 방긋 웃으며 먼저 입을 떼었다.
“한국도 아닌 시드니에서, 이런 방식으로 배우님을 만나다니. 참 사람 일은 누구도 모른다더니...”
"그러게요, 한국에선 안 풀리던 게 외국 나오니 풀리네요. 한국엔 저를 나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게 트라우마였거든요. 혹시라도 사장님이 저에 대해 나쁜 생각을 갖고 계실까 봐..."
"트라우마라... 흠... 그걸 뛰어넘지 못한 거예요? 아님 뛰어넘기 싫은 거예요?"
주이의 돌발 질문에 최재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마, 어려운 질문이네요. 어쩌면 둘 다 인 것 같아요. 근데 오늘 사장님이 제 팬이었다는 말 들으니, 이번엔 이 트라우마를 부숴버릴 수 있겠다는 힘이 생깁니다."
"그럼요. 그래야죠. 잘하실 거예요. 제가 내일부턴 진짜 잘해 볼게요. 응원합니다."
"오... 진짜죠? 그럼 전, 사장님만 믿어보겠습니다. 자, 하이파이브!"
둘은 손뼉을 부딪히며 가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침 가게 문을 열고 나온 감독이 둘의 하이파이브 장면을 목격하고는 갑자기 최재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감독은 끌어안은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최재수는 "형, 저 아직 안 취했어요."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감독은 "너 진짜 조심해라." 한 마디 남기고 화장실로 유유히 사라졌다. 주이는 두 사람이 형동생하며 지내는 사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란 한편, 그 둘에게도 주이가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전집에 들른 단골 리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이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뭔가 굉장히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주이에게 속삭이고는 전처럼 수다스럽게 말을 걸진 않았다. 시드니전집을 오고 가는 손님들을 배려해 스태프들이 미리 촬영에 대한 사전양해를 구하는 메시지를 매대 앞에 붙여 두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서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이 촬영 중입니다. 카메라 앞에서 주고받은 대화들은 적당한 편집과 각색을 거쳐 TV로 방영될 예정이니 참고 바랍니다.'
주이는 촬영 중간 튀어나오는 자신의 촌스러운 사투리가 번번이 거슬렸지만 어제와는 달리 수줍어하지 않았다. 또 술에 취해 팬이었다는 것을 고백한 걸 후회하며 아침에 이불킥을 몇 번이나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하고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최재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거야 말로 진정한 팬심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은 어제보다 죽이 더 잘 맞았다. 주이는 손이 느린 최재수에게 김치전 반죽을 네 개 부었을 때, 처음 부었던 반죽을 뒤집으면 되겠다고 전 뒤집는 타이밍을 잡아줬다. 다 익은 김치전은 뒤지개를 꾹 눌러줘야 바삭해진다는 설명에 최재수는 한 번 비교해 보자며 뒤지개로 누른 것과 안 누른 것의 맛의 차이를 비교했다. 결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는 바삭한 전을 맛보더니 뒤지개로 누른 것이 훨씬 바삭하다며 놀라워했고, 주이는 사장이 전을 다 먹어버리면 팔 게 없겠다고 귀여운 면박을 줬다.
한 중국인 손님이 다른 곳에서 먹어 본 김치전과 맛이 다르다고 속재료를 물으니 최재수는 TUNA(참치)가 들어갔다고 답하며 마치 그 레시피를 자기가 개발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외국인 손님들은 엄지 척을 들었고, <갑(甲) 자기 사장님!>을 즐겨본다는 한국인 손님에게는 클로버를 눌러줄 것을 약속받았다. 어릴 적 팬이었다는 주이 또래의 엄마들이 앞다투어 싸인을 요청했다. 하 PD는 최재수가 사인하느라 전을 뒤집지 못할 때 옆에서 서둘러 전을 뒤집으려는 주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에게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자기 팬에게 취해 김치전이 새카맣게 탄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린 최재수는 제 머리를 때리며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틀간 주이와 최재수의 촬영이 끝나자, 3일 차부터는 제니가 최재수를 보조하며 사흘간 장사를 이어 나갔다. 주이는 카메라 밖에서 둘의 장사를 지켜보며, 필요 시마다 도움을 줬다. 후방 카메라 중 하나는 최재수를 지켜보는 주이의 모습을 꾸준히 촬영했다. 주이의 몸짓, 웃음, 표정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찍히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둔 밤, 아이들을 재운 주이는 발코니에 나와 맥주 한 캔을 홀짝였다. 늦은 시간 마시는 맥주 한 캔은 밤의 무드를 장악함은 물론 숙면을 도왔다. 이 밤을 다 가진 사람처럼 흡족한 표정으로 야경을 감상했다. 안주는 시원한 밤공기 하나면 충분했다. 적막을 기다렸다는 듯 진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은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고, 진혁은 야근 후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오늘 촬영은 잘했어?”
“응, 이제 하루 남았어, 좀 시원섭섭한 걸?”
“최재수는? 그 사람 어때?”
“뭐가 어떠냐는 거야? 매너 있는 서울 남자야. 나한테 잘해주고 친절해. 연예인이지만 소탈하고 인간적이야. 촬영 때문에 장사가 안 되긴 해도 그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어.”
“잘 되겠지. TV에 나올 거니까. 자긴 칭찬을 아주 남발하네? 촬영 중이니까 당연히 친절하겠지.”
주이가 한때 '최재수와이프'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남편은 최재수가 주이네 가게에서 촬영하는 상황이 어쩐지 못마땅한 듯했다.
“자기 설마, 나랑 최재수를 질투하는 거야? 호호...”
“질투는 무슨, 그게 아니라... 그놈, 여자문제가 아주 복잡하대.”
“최재수가 뭘 잘못했길래 그놈이래? 자기보다 두 살은 많은 형이거든? 그리고 여자문제를 어떻게 알아? 그런 게 검색하면 나와?"
“응, 다 아는 수가 있어. 아무튼 넌 조심해. 잘해준다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고."
“아휴, 조심할 게 뭐 있겠어? 설마 그 사람이 나한테 작업이라도 걸까 봐?”
“네가 호감을 보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봐, 나는.”
“와이프를 못 믿네, 쯧쯧...”
“기러기 아빠인 내 신세가 처량하지.”
“하하하.... 혼자 있을 때나 잘 즐기세요. 나중엔 혼자인 시간을 엄청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내가 집 근처에 cctv 다 설치해 놨으니까 바람피울 생각 근처에는 얼씬도 말고. 내 걱정은 붙들어 매."
주이는 남편의 귀여운 걱정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두 사람이 썸이라도 탈까 봐 걱정을 했다니, 암만 생각해도 영화 같은 시나리오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배우와 어른이 돼서 만나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클리셰. 주이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최재수와 썸 타는 상상을 비밀스럽게 하다가 잠이 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촬영날이 밝았다. 최재수는 첫날보다 한결 나아진 손놀림으로 전을 부쳤다. 카메라가 전 부치는 장면을 클로즈업 촬영했다. 팬에 가까이 댄 마이크는 지글지글 전 익는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 뇌에 심리적 안정감이나 쾌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소리)까지 담았다. 최재수가 하는 일을 척척 거드는 제니의 표정도 밝고 신나 보였다. 흘러나오는 Charlie Puth의 ‘I don't think that I like her’ 곡에 맞춰 제니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는 어느새 최재수를 사장님이라 부르며 아슬아슬 선 넘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장님. 전을 아주 잘 부치시네요, 시드니 전집 2호점 내시지 그래요?"
“그럼 Jenny가 와서 도와줄래요?"
“쉿! 진짜 사장님이 아시면 저 혼나요."
“혼난다고요? 아이고, 무서운 사장님이시네. 저한테 오세요. 제가 당장 2호점 낼게요.”
넉살 좋게 주고받는 대화들을 지켜보면서 주이는 질투심도 뭣도 아닌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어제도 저랬나? 나랑 촬영할 때보다 더 친근하게 대해주는데?‘
보조 카메라 감독은 그런 둘을 지켜보는 주이의 표정도 빠짐없이 담았다. 불편한 기색이 조금이라도 담길까 봐 괜스레 머리를 여러 번 쓸어 올리고, 손으로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마감 시간이 임박하니 남은 전은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나눠주고 준비한 전을 모두 소진한 뒤 하 PD가 영업종료를 선언했다. 제작진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주이와 제니, 최재수는 머리를 맞대고 사흘간 매출을 점검했다. 현금 매출은 거의 없었고 카드가 대부분이었지만 5일 간 약 $1,000의 매출을 올렸다. 촬영이 목적인 영업이었으므로 최재수가 벌어들인 수입은 평소 매출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돈 보다 값진 경험을 얻었으니 주이는 매출액에 연연하지 않았다.
하 PD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시드니전집에 설치했던 각종촬영장비들을 철수하고 촬영 첫날 갔던 한인 식육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드니에 맛집은 많지만 모두의 기호를 만족시키기에 삼겹살 만한 것이 없었다. 첫날과 달리 제니와 최재수가 나란히 앉았고, 주이 옆에 하 PD가 앉았다. 주이는 하영석 PD에게 인기 예능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거장의 아우라를 느꼈다. 이렇게 유명한 PD가 자신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자리를 어색하게 고쳐 앉았다.
“사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협조를 아주 잘해주신 덕에 무사히 촬영 마쳤네요."
“별말씀을요. 저에게도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살면서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요. 최재수 씨가 클로버를 많이 받아서 바빠지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잘 만들어 봐야죠.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의미로 다 같이 건배하시죠! 갑자기 사장님! 파이팅!”
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제작진들이 감독의 건배사에 기분 좋게 잔을 부딪혔다. 최재수는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잘 구워진 삼겹살 하나를 상추에 싸서 제니에게 먼저 내밀었다. 제니는 입을 ’아‘벌려 최재수가 주는 쌈을 받아먹고는 엄지 척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주이는 자신이 이틀, 제니가 사흘을 함께 보냈으니 더 친해졌을 테고, 제니가 훨씬 붙임성이 좋으니 그와 서슴없이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언제 들어가시나요?”
주이가 물었다.
“원래 내일 제작진과 함께 들어가는 일정이었는데, 촬영 때문에 주변 관광을 통 못해서 저만 항공권을 1주일 정도 연장했어요.”
“시드니에 가볼 만한 곳이야 아주 많죠. 근데 스태프분들은 다 내일 돌아가시는 건가요? 촬영 때문에 관광도 제대로 못하셨을 것 같은데...”
주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 PD를 쳐다봤다. 그는 추석 연휴에 맞춰 방영해야 되니 촬영이 끝나도 편집과 제작회의를 하느라 주변 관광지를 둘러볼 짬이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다음 에피소드도 촬영이 코 앞이라 서둘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주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의 정수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제작진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허 PD와 제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최재수는 작은 소리로 주이에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요."
"아... 정말요?"
"맛있는 식당 알려주시면 제가 보답하는 의미로 한턱 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닙니다. 비싸고 맛있는 데로 알려주세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연락처 여기 알려주세요."
주이는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따는 최재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비밀이 생긴 것처럼 주이의 얼굴이 빨개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설마 카메라가 이런 모습까지 찍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카메라도, 주이를 보는 이도 없었다. 멀찍이 제작진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허 PD를 포함해 다들 촬영 뒤풀이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주이는 순간 어제 남편이 했던 말이 번쩍 떠올랐다.
'넌 조심해. 잘해준다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고.'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제니는 정시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어제부터 하늘의 먹구름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촬영장이 됐던 시드니 전집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제니는 주이가 미리 준비한 재료를 세팅하고 팬을 예열했다. <갑(甲) 자기 사장님!>을 촬영하면서 제작진이 만들어 준 배너가 새로운 가족이 된 것 외에 시드니전집에 바뀐 것은 없었다. 주이는 토요일 저녁 최재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를 잠시 떠올렸다.
"사장님, 그거 아세요? 최재수 씨가 사장님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예열한 팬에 식용유를 뿌리는 주이에게 제니가 불쑥 다가오며 말했다. 팬 위에 둥근 틀을 고정하고 제니가 뒤섞은 반죽을 틀 위로 하나씩 부었다. '치이' 소리를 내며 지글지글 김치전이 하얀 김을 내뿜었다. 주이는 한참 뒤 제니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지난주에 촬영하면서 저 되게 배우님이랑 친해졌거든요. 저희 아빠랑 다섯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오빠처럼 젊고 친근하더라고요. 사장님 안 계실 때 촬영장 밖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나눴는데 배우님이 사장님한테 관심이 많더라고. 사장님이 자기 취향이라나?"
"에이, 무슨..."
주이는 일부러 개수대에 용건이 있는 척 몸을 돌려 빨개진 얼굴을 숨겼다. 지글거리며 익은 전을 꾹 눌러 바삭하게 만든 뒤 채반에 올려 한 김 식혔다. 제니는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주이가 희한하다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장님은요? 사장님도 팬이라고 하셨잖아요?"
"아 맞다, 오늘 요 앞 오피스에서 육전 단체주문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맞다! 제가 확인해 볼게요!"
주이는 대답을 미루고 일부러 제니의 관심을 돌렸다. 잘생긴 배우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나. 다만 그녀보다 나이가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제니에게 철없는 유부녀의 속내를 꺼내 놓기는 싫었다. 제니로부터 한 번 더 들은 최재수의 고백을 소중히, 오랫동안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다.
토요일 저녁 재즈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에 와인 한 병을 비운 그들은 흡사 연인 같았다. 밀가루를 쏟아 바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추억을 꺼내 서로 깔깔 웃었고, 하도 맛있어서 주이 몰래 집어먹은 전이 100장은 될 거라고 말하는 최재수를 그녀가 귀엽게 째려보기도 했다. 그는 내내 주이의 사투리를 놀리듯 흉내 냈고, 주이는 그의 장난에 마음껏 웃었다. 이른 저녁을 배불리 먹은 그들은 소화도 시킬 겸 근처 공원 주위를 산책했다. 서늘한 밤공기를 나눠 마시며 둘만의 촬영 뒤풀이를 이어 나갔다. 시드니 하늘에 별이 하나둘씩 반짝이기 시작했다. 탁 트인 공원 산책로를 걷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주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 도착하자 최재수가 걸음을 멈추고 주이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시드니 촬영은 제 남은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사건이 될 거예요. 제 새로운 시작에 주이 씨가 함께 해줬다는 게, 그런 주이 씨가 제 팬이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요. 하... 주이 씨 딱 제 이상형인데, 아쉽지만 우리 친구 할래요?"
"네?"
"아, 오해는 마시고요. 그냥 친구요, 요샌 남사친, 여사친이라고들 하던데, 주이 씨랑 시드니에서 촬영한 기억을 오래오래 나누고 싶어서요.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을 함께해 준 고마운 은인이니까요."
"좋죠. 전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배우님 팬이에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정말요? 아, 그때 내가 그 레모나 팬을 어떻게든 찾았어야 했는데... 하하... 주이 씨도 이제 절 그냥 오빠라고 불러요."
"아... 그건 차차 노력해 볼게요. 저 또한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 한 주였어요. 그리고 겨우 팬이었던 저에게 여사친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드니에 오길 진짜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주이는 최재수를 향해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오빠라니, 또 한 번 '재수오빠'에 얽힌 에피소드가 떠올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최재수는 소리 내어 웃는 주이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주이가 최재수의 손을 잡으니 그가 부드럽게 손을 흔들었다. 주이는 최재수의 따뜻한 감촉이 남은 손바닥을 펴서 '안녕' 손짓하고 서둘러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재수도 '안녕' 손짓을 했다. 그의 표정이 달보다 환해졌다. "연락할게요." 주이는 그의 마지막 인사에 고개를 끄덕하면서 마저 손을 흔들고 아파트입구로 들어갔다. 최재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발길을 돌렸다.
마침내 <갑(甲) 자기 사장님!> 시드니 편 1화가 명절 연휴 금요일 밤 11시 방영을 시작했다. 시드니 시간 새벽 1시, 주이와 아이들, 제니와 주연이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5일간의 촬영이 어떤 결과물로 방송될지 사회자의 진행에 기대감과 초조함이 고조됐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명절 연휴 특집으로 방영되는 <갑(甲) 자기 사장님!>에서 오늘 모실 분은 25년 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대세 꽃미남입니다. 나와주세요. 최! 재! 수!"
패널들의 박수와 함성을 받으며 그가 스튜디오에 등장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최재수의 프로필, 그의 리즈시절, 그리고 현재 쿠팡맨으로 활동하는 근황이 공개됐다. 그 영상을 본 제니는 "와... 젊을 때 진짜 인기 많으셨겠어요. 요새 아이돌 뺨치는 외몬데요?" 하면서 감탄했다. 주이도 오랜만에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잘생기고 다정한 얼굴의 최재수, 그의 리즈 시절을 보니 주이는 다시금 열일곱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어서 시드니전집을 소개하는 장면이 시작됐다. 시드니에 전집이 있는 것도 신기한데 시드니전집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촬영을 신청했다는 사회자의 소개에 주이는 화들짝 놀라 제니를 쳐다봤다. "제니가 촬영신청했던 거예요?" 이렇게 된 이상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냐는 표정으로 주이를 바라보는 제니. 제니에게 진실을 추궁할 새도 없이 주이와 최재수가 처음 만난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시작됐다. 주이의 사투리 장면, 최재수의 실수 장면 등이 재밌는 자막과 함께 등장했다. 화면 속 제니는 젊고 싱그러웠다.
총 2부작으로 구성된 <갑(甲) 자기 사장님!> 1화 방송이 끝나자 주이의 휴대폰은 바쁘게 알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