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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Mar 18. 2024

당신을 이곳에서 만날 확률

보고 싶었어요.


제법 더워지기 시작한 10월의 시드니에는 호주의 여름을 즐기러 온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매대 바깥으로 보이는 패디스마켓의 풍경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주이의 가슴에 쌓였다. 시드니 전집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이 선 뒤부터는 주이에겐 매 순간이 '마지막'으로 켜켜이 쌓였다. 빨간 트램이 지나갈 때 덜컹 거리는 소리, 장발의 중국인 버스커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외국인, 바로 옆 카페에서 풍겨지는 고소한 커피 향과 캐러멜 와플향, 코알라 가방에 캥거루 모자를 쓴 귀여운 아이들과,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바쁘게 걸어가는 직장인의 모습을 차곡차곡 적립했다. 보라색 자카란다와 청명한 하늘은 이 장면을 보듬는 액자의 배경이 됐다. 주이는 멍하니 눈앞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시드니 전집을 개시했다.


그녀는 오늘따라 전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반갑게 인사했고 평소보다 정성을 담아 전을 부쳤다. 포장하는 손놀림도 서두르지 않았다. 시드니에서 전집을 차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처음의 마음을 떠올렸다. 이제까지 매대 앞에서 부친 전은 모두 몇 장이나 될까. 지글지글 전 익는 소리와 느끼한 기름 냄새는 아직도 질리지 않았다. 바삭하고 따끈한 전이 손님의 입 속에 들어갈 때를 지켜볼 때 그녀의 몸에서 도파민이 솟구쳤다. 전을 포장해 가는 한국인 손님에게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제니가 다가와 물었다.


"사장님, 오늘 평소랑 좀 다르신데요?"

"응? 뭐가요?"

"오늘따라 그냥 멍하니 서 계실 때도 있고, 그리고 원래 한국인 손님들한테 '또 오세요'라고 인사하는데, 오늘은 그 말 한 번도 안 하신 거 아세요?"

"아, 내가 그랬나? 그걸 다 그렇게 세어본 거예요?"

"네, 말도 없으신데 인사까지 평소랑 다르니까요. 혹시 무슨 고민 있으신 건 아니죠?"

"고민이야 늘 넘쳐나죠, 후훗."

"이상한데... 혹시 지난번에 왔던 그 아저씨한테 시드니전집을 넘기시는 건 아니죠?"

"이 가게는 원래부터 내 것도 아니라 누구한테 넘기진 못해요."

"진짜 별일 없으신 거죠?"

"한국 손님들 오시면 줄 무료음료 좀 채워야 할 것 같은데, 마트에서 레모네이드랑 사과주스 좀 사 올래요?"

"아... 네, 지금 얼른 다녀올게요!"


지난번 인플루언서들이 전집에 다녀간 뒤로 무료음료를 찾는 한국 손님이 서너 번 더 왔다. 주이는 그때마다 종이컵에 음료를 담아내주곤 했다. 이왕 베푸는 김에 손님이 묻기 전에 '같은 한국사람이니까 서비스로 음료도 줄게요.' 하면 스스로가 좀 더 멋져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국인 손님의 입장에선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 전집이 반가울 테고, 느끼한 전을 먹을 때 탄산음료와 곁들여먹으면 더 맛있으니 말이다. 주이는 시드니 전집을 방문한 한국인들에게 '결정적인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종이컵에 음료수 한 잔 따라 주면서 '결정적인 경험'이라니, 너무 과한 것 같지만 얄짤 없는 세상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공짜는 반갑다. 시드니에 있는 전집까지 와서 공짜 서비스를 받는 경험은 호주여행에서 결정적인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호주의 어떤 가게에서도 탄산음료를 공짜로 받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제니가 자리를 뜨자 주이는 문득 지난번 촬영 때 최재수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팬에 흩어진 계란 부스러기들을 정돈하던 최재수는 주이에게 시드니 전집을 운영하면서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었냐고 물었다.


"한 번은 인플루언서가 시드니 전집에 왔었는데, 제가 잘 보이려고 음료를 무료로 줬거든요, 그랬더니 SNS에 시드니전집은 음료를 무료로 준다고 올렸지 뭐예요?"

"아! 정말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인플루언서가 다녀간 뒤로 음료수를 서비스로 주면 안 되냐고 묻는 한국인 관광객이 왔거든요. 이건 뭐지? 싶은 마음에 혹시나 하고 SNS를 뒤져봤는데 그 인플루언서 피드를 본 거죠."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어쩔 수 없죠, 물어보는 한국인한테만 페트병 음료를 종이컵에 따라 줬어요."

"아 너무 당황스러운데요."

"네, 심지어 병음료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건 좀 어렵겠다고 양해를 구하는데 손님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할 수 없죠. 대신, 마트에서 대용량 음료를 사놓고 종이컵에 따라 줬어요. 병음료는 서비스로 주기엔 단가가 좀 비쌌거든요."

"만약 저였다면 그냥 모른 채 했을 것 같아요, '서비스라뇨? 사드셔야죠?' 하면서 말이에요."


최재수는 뒤지개를 손에 든 채로 능청스러운 사장님 연기를 했다. 주이는 그의 연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그래도 인플루언서의 피드를 보고 일부러 와 준 거니까 고마운 마음으로 대접해야죠. 이왕이면 맛있는 음료수로 찾아서 대접하게 됐어요."


주이의 말을 들은 최재수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참 뒤 말했다.


"사장님은 대인배시네요."

"대인배라뇨, 마트에서 사 온 음료수는 별로 안 비싸요, 호주 병음료 가격보다 마트에서 산 대용량 음료수가 훨씬 싸요."

"가격을 떠나서 고마운 마음으로 대접한다니, 갑자기 제가 좀 부끄러워지네요."

"부끄럽다뇨?"

"사실, 제가 힘든 일 겪고 나서 당시에 신인 감독들한테 '조연으로 출연해 달라' 부탁을 몇 번 받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런 데는 출연 안 하고 싶다고, 나를 뭘로 보냐고 거절했는데, 아 글쎄, 그 신인 감독들이 나중에 그렇게 잘 나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일을 쉬는 동안 작은 기회들이 종종 찾아왔어요. 그런 것들은 제 몸값만 낮춘다고 생각하고 뻥 차버렸죠. 그 비루한 욕심 때문에 제가 이렇게 긴 시간 방황한 것 같아요. 돈을 안 받고서라도, 돕는 셈 치고 활동을 이어나갔더라면 이렇게 공백기가 길지 않았을 텐데... 사장님 마음 씀씀이가 저를 부끄럽게 만드네요."

"음료수 서비스로 주는 거에 최재수 씨 경우를 비교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네요. 자책 말아요."

"제가 방금 사장님 말씀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세요? '서비스는 줄 수 없으니 음료수 사서 드세요'라는 말을 어떻게 전달할까? 이런 고민을 했단 말입니다. 서비스로 줄 음료수까지 마트에서 미리 사다 놓는 사장님 같은 분도 있는데 말이죠."


주이는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주이에게 최재수는 진지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때론 철부지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최재수가 서 있던 이 공간이 그와의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 촬영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빨개졌다. 주이는 바빠질 점심시간을 대비해 미리 반죽과 계란을 꺼냈다. 초벌로 부쳐두면 손님이 주문했을 때 빠르게 구워 내줄 수 있다. 팬을 달구고 기름을 둘렀을 때, 멀리서 걸어오는 한국인 노부부가 보였다. 입은 옷에 커다랗게 써진 'DAKS' 글씨를 보니 한국인임이 분명했다. 손님을 맞이할 태세를 갖춘 주이는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시드니 전집입니다. 뭘로 드릴까요?"

"아... 안녕하세요?"

주이는 매대 앞으로 가까이 다가 온 손님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노부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주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졌다. 한가한 오전 시드니전집에 찾아온 이 노부부는 주이가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한국인에게 무료로 제공할 레모네이드와 콜라를 양손에 든 제니는 땀이 뻘뻘 났지만, 마침 콜스에서 레모네이드가 세일 중이라 한 병 살 것을 두 병을 샀고, 주이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게 근처까지 걸어왔을 때 매대 앞에 주이가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나?'


매대 안쪽으로 주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안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제니가 아르바이트를 한 뒤로 <갑(甲) 자기 사장님!> 촬영 이후 가게 안에 들어온 낯선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주이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시드니전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주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고든 카페사장님 부부였다. 그녀가 17년 전 시드니에서 워킹홀리데이로 머물던 시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 고든카페의 사장님 부부 말이다. 행방을 알지 못해 궁금했는데 이렇게 주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다니, 두 사람은 얼굴에 주름살이 조금 는 것 빼고는 놀랍게도 표정과 목소리에 변함이 없었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전집을 하겠다고 매달 임대료를 냈던 사람이 너였니?”

"설마, 그럼 수지의 작은 어머니가....”


8개월 전 시드니에 전집을 차려볼까 하고 시드니부동산을 검색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운명처럼 주이의 머리를 스쳤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이분들을 다시 만나기로 예정된 순간은. 수지를 만난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무엇이 나를 지금 이 순간까지 오게 만든 걸까.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가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일까?' 


주이는 현기증이 났다.


수진은 매대 밖에서 가게를 한 번 둘러보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와 그간 가게 내부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주이는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홀은 건드리지 않고 입구 옆으로 난 창문을 개방해 매대를 만들었다. 매대 아래로 작은 테이블을 두었고 출근과 퇴근 시, 개수대를 사용할 때에만 주방을 이용했다. 임대료를 절약할 수 있게 도와준 장본인들이 언제 들러도 불편해하지 않도록, 당장 내일부터 식당을 운영해도 불편함이 없도록, 깨끗하고 단정하게 사용할 것을 내내 의식하며 전집을 운영했다. 


 “어머, 얘는 무슨 장사를 이렇게 점잖게 한다니?”


등 뒤로 중얼거리는 사장님 특유의 목소리가 과거의 추억과 오버랩되면서 주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주이가 상상한 여사장 수진의 모습은 인자하면서도 늘 미소 띤 표정이었다. 시간의 소용돌이가 과거를 빨아올려 주이와 수진을 미래에 데리고 온 것만 같았다.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트렸다.


“사장님, 이렇게 만나다니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요... 저... 진짜 너무....”

“아니, 얘가 왜 울어? 대체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했다고, 울지 마라 얘, 고맙다면 우리가 고맙지 네가 왜 그렇게 고마워?”


주이의 어깨를 살며시 쓰다듬던 수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떠올리고 싶은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는 게, 그런 추억들을 마음에 잔뜩 안고 산다는 게 얼마나 기쁘고 벅찬 일인지 모르실 거예요. 고든 카페는 제가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곳인데 어떻게 잊겠어요. 첫사랑처럼요. 사장님 기억나세요? 닭가슴살 결대로 찢어야 더 맛있다고 하신 거요. 비트는 닭가슴살이랑 얹으면 색이 변하니까 꼭 상추 위에 올리라고 하신 것도요. 전 이 모든 거 다 생생하게 기억해요."

“세상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살았니?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뿌듯하다 얘... 네가 일하던 그즈음, 실은 우리가 사춘기 애들 일로 근심 걱정이 아주 많았을 때거든. 워낙 일을 잘하고 살가워서 너처럼 키우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었는데... 네가 가버린 후로 우리도 가끔 네 이야기를 했어. 너 이후로 뽑은 아르바이트생이 다들 그렇게 일 머리가 없지 뭐니?”


그 말을 들은 주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렇죠? 저 만한 아르바이트생이 없었죠?”

“그래... 애교도 많고 싹싹했지. 어머, 넌 근데 어쩜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니? 뻔뻔한 것도 그대로다야, 호호호... ”


몰래 대화를 훔쳐 듣던 Jenny가 인기척을 했다. 더 이상 엿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주이가 우는 걸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옆에 선 두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참, 지금 저랑 일하는 이 친구가 일을 참 잘해요. 아르바이트 뽑을 때 사장님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제니, 인사해요. 내가 말한 적 있었나? 17년 전에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할 때 내가 일했던 카페 사장님이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어후, 키도 크고 너무 예쁘다..."

"감사합니다."


주이는 제니를 수진부부에게 인사시킨 뒤 수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 이제 가게를 다시 운영할 생각이신 거죠? 제가 언제까지 비워드리면 될까요?”

“아… 그게…”


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남편의 눈치를 봤다. 남편은 이제 더 미룰 수 없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여자사장님이 입을 떼려는 순간, 외국인 손님이 전을 주문하려고 매대 가까이 다가왔다.


“얘, 손님 왔다. 이따 이야기하고, 손님 받아야지.”

“아... 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데요? 하하...”


주이가 손님의 주문을 받는 동안 수진 부부는 조용히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내일 다시 오겠다며 가게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육전을 포장해 손님에게 전달한 주이는 Jenny에게 방금 다녀간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니, 어쩌면 이제 곧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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