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어야 할 곳
제니는 다른 일을 알아보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 호주로 돌아온 수진 부부는 전집을 차렸던 한식당 바로 옆 카페를 인수했고 한식당과 카페를 병행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수진은 늘 고든카페를 그리워했다. 몸을 더 혹사시키는 한식당은 벌이가 좋았지만 수진의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한식당을 포기할 수 없다는 그녀의 남편이 결국 카페도 운영하자는 결론을 냈다. 수진은 카페만 전담하고 한식당은 남편이 일할 사람을 고용해 운영하기로 했다. 수진은 제니를 새 카페의 1호 매니저로 채용했다. 면접은 짧고 진지했다. 제니는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성실한 직원이었다. 면접 마지막에 수진은 제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부탁할 게 있는지 물었고, 제니는 카페에서 동영상 촬영을 허락해 준다면 열심히 일하겠다고 조건을 달았다. 주이로부터 제니가 하는 일에 대해 들은 바 있기 때문에 수진은 흔쾌히 허락했다.
제니는 <갑(甲) 자기 사장님!>이 물꼬를 터 준 덕에 이곳저곳에서 광고 출연 요청을 받았다. 영어 공부 1등 앱인 <스픽영어> 광고 모델로 발탁됐고, 해외 각국에 지사를 둔 어학원의 호주 담당 홍보대사가 됐다. 돈도 벌고 영어실력도 극적으로 향상된 제니의 워킹홀리데이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주이는 처음에 제니가 시드니전집에서 촬영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자신이 거절하지 않은 것이 참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그랬다. 훌륭한 사장은 일을 잘 시키는 사장이 아니라 직원이 성장하도록 돕는 사장이라는 말. 주이는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제임스는 20년 전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시드니로 이민을 왔다. 그의 부모님은 한국의 소형 가전을 파는 일로 작게 사업을 시작했고, 고장 없이 튼실한 한국 전기밥솥이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서 주력 상품이 됐다. 시드니에서 쿠쿠와 쿠첸 밥솥을 최저가로 사려면 제임스네 가게를 거쳐야 했고 기세를 몰아 채스우드에 꽤나 큰 전자상가를 소유한 부동산 부자로 성장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는 치매가 심해진 그의 어머니와 시티에 나왔다. 후각이 예민한 어머니가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제임스를 시드니전집에 끌고 갔다. 이가 불편한 제임스의 어머니는 시드니전집에서 파는 부드러운 육전이 아주 맛있다며 좋아했고, 전을 다 먹은 뒤에도 한참을 서서 주이가 전을 부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머니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 번졌다. 나중에 들으니 어릴 적 시골에서 전을 부쳐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 뒤로도 제임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육전을 먹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사업이 바빠 좀처럼 시티에 나갈 일이 없던 제임스는 미루던 숙제를 하러 시티로 향했다. 요즘 통 입맛이 없어 잘 못 드시는 어머니의 부탁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붐비는 시티의 주차난에 시간을 다 써버린 그는 3시가 다 돼서야 전집에 도착했다. 그때 주이는 하루 장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요즘 기운이 없는 노모에게 줄 육전을 꼭 사가야 한다고 주이에게 통사정을 했다. 다시 전을 부치려면 계란물도 풀어야 하고 밀가루도 다시 채에 털어야 했기에 주이는 난색을 했다. 잠시 망설이던 주이는 제임스에게 시간이 좀 걸리는데 기다릴 수 있겠냐 물었다. 제임스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며 전 값의 두 배를 쳐 주겠다고 했다. 주이는 가장 먼저 팬의 전원을 켰고, 다시 재료들을 꺼내 전 부칠 준비를 했다. 달궈진 팬에 육전 10장을 차례로 부쳤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포장 용기에 하나씩 담기는 전을 차례로 지켜보던 제임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막 익은 전이 눅눅해지지 않도록 뚜껑을 덮지 않은 채로 포장 봉투에 담아 건넸다. 제임스는 봉투와 주이를 번갈아보며 불쑥 물었다.
"저, 혹시... 체인점을 낼 생각은 없으세요? "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주이는 당황한 눈치였다. 전이 맛있다는 칭찬을 에둘러 한 건지 아니면 진짜 체인점을 내고 싶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왜요? 체인점 내고 싶으세요?'라고 농담으로 받아치려다 말았다.
“글쎄요. 아직은 생각 안 해봤어요. 문의한 사람도 손님이 처음이고요. 50불입니다. 10장 포장하시면 10불 할인해 드려요.”
제임스는 결제를 기다리는 주이의 표정을 눈치채고 얼른 카드를 내밀었다.
“아, 100불 결제해 주세요. 약속은 지켜야죠.”
그러나 제임스가 받은 영수증에는 50불이 찍혀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퇴근이 늦어져 죄송해요. 저희 어머니가 진짜 좋아하실 거예요. 그리고 체인점 내는 거 한 번 고민해 주세요. 저는 일주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제임스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주이에게 내밀었다. 부동산 투자회사 그룹 대표, 이름은 제임스 김. 명함을 찬찬히 살피는 주이를 보고 그는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두 시 반에 그가 다시 시드니전집에 나타났다. 어머니에게 갖다 줄 육전을 10개 포장하고, 영업시간이 끝나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느냐고 주이에게 물었다. 그가 지난주에 남기고 간 명함과 체인점 제안은 일주일 동안 주이를 들썩이게 했지만 다시 찾아온 그에게 주이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주이는 일단 그가 무슨 생각으로 체인점 문의를 한 건지 들어볼 생각으로 영업이 끝난 뒤 유일하게 문을 연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어보신 것, 생각은 해 봤는데요. 시드니전집이 방송을 좀 탔다고 이렇게 무리해서 체인점을 내시면 인기가 오래가지 못할까 봐... 그게 좀 걱정이 돼서요.”
“무슨… 말씀이세요? 방송이라뇨?”
“갑자기 체인점을 문의하시는 것 보니까, 방송 보고 오신 것 아니세요?”
“시드니전집이 방송에 나왔나요? 저는 방송을 본 게 아니라 사장님이 전 부치는 모습을 보고 체인점 문의를 한 건데요?”
주이는 일주일 동안 그가 갑자기 체인점 문의를 한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 봤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 이유는 방송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사장님 방영 이후로 주이는 잡지 인터뷰나 방송 출연 제의를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주이는 제임스가 방송의 인기를 등에 업고 장사가 잘 될 거라는 무리한 기대를 한 게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제임스는 주이가 팬 위에서 전을 부치는 손놀림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고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는데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란다. 믿거나 말거나, 바로 그 점이 투자를 결심한 계기라고 했다. 요새 뜨는 맛집들의 공통점은 고객들에게 ‘먹는 즐거움’ 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까지 선사하는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경험에 투자하는 현대인의 니즈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고 한다. 전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도 투자 결정에 매우 기뻐하셨다고 덧붙였다. 시드니 전집이 방송에 나왔다는 사실 쯤은 제임스의 투자 결정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 보였다.
제임스는 주이가 지금 운영하는 전집을 곧 철수할 예정이라는 말에 크게 놀라며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자신이 보유한 채스우드 상가에 시드니 전집 2호점을 차릴 수 있는지 물었다. 주이가 한국에 가기 전까지 컨설팅을 해 준다면 수수료와 사례를 섭섭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운을 띄웠다. 게다가 시드니전집의 창업자인 주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말하면서, 2호점이 잘 되면 3호점도 낼 생각이 있고, 점포가 추가될 때마다 수수료도 내겠다고 제안했다. 주이는 그의 제안이 솔깃했지만 한편으로 의구심이 일었다.
"전집을 차리고 싶으면, 굳이 시드니전집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요? 제임스 전집도 나쁘지 않고요. 후훗."
“저는 투자가 직업인 사람입니다. 사자가 사냥을 해야지, 통조림을 먹을 순 없죠.”
우문현답에 할 말을 잃은 주이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계약은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계약금은 즉시 입금됐다. 시드니전집에서 사용하던 집기와 배너 등 안 그래도 애물단지였던 비품들은 제 값을 받고 2호점으로 옮겨졌다. 출국일을 정한 주이는 남은 시간 동안 시드니전집 2호점에 각별히 정성을 들였다. 전집 시그니쳐 로고가 새겨진 포장박스와 유산지를 제작하고, 담양 특산품인 대나무 뒤지개와 채반 등을 해외배송으로 주문했다. 주이는 제임스가 지불한 수수료와 컨설팅 비용으로 구멍 난 마이너스 통장을 달랠 수 있었다. 제임스는 주이에게 고마워하면서 나중에 시드니에 놀러 오면 자기가 아끼는 별장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주이는 그 약속 때문에라도 꼭 다시 시드니에 오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폴이 만든 L카페의 플랫화이트를 맛볼 수 없게 되어 슬프네요. 바나나브레드도 그리울 거예요."
"글쎄요,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저, 곧 한국 들어가요. “
“네? 그럼 가게는 어떻게 하고요?”
“이 카페 그대로 광교에 옮겨 놓기로 했어요. 램프의 지니처럼요. 오픈하면 놀러 오실 거죠? 바나나브레드도 팔 거거든요. 스텔라세트도요."
폴은 마치 자신이 램프의 지니라도 된 것처럼 양손을 들어 카페를 그대로 한국에 옮기는 시늉을 했다. 주이는 전과 달리 밝아진 폴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 풀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세상에, 광교에 L카페를 오픈한다고요? 너무 잘 됐어요. 지난번에 속상해하셔서 걱정했는데, 결국 잘 됐군요?"
"L카페 단골 고객 한 분이 매장을 좋은 가격에 매수한다고 해서요. 한국인 관광객 손님들 반응이 꽤 좋아서 차라리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해 보면 어떨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의 한 투자자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호주여행 카페에서 우리 카페 굿즈랑 원두가 여행 선물로 입소문을 타더니 여행 유튜버들이 소개해줘서 수요가 엄청 늘었거든요. 드디어 제가 오랫동안 꿈꾸던 플래그십 스토어도 같이 시작하기로 했어요."
"폴, 정말 축하해요. 너무 잘 됐어요. 광교 건물주가 되시다니요! “
"50%는 투자받아서 하는 거니까 건물주는 아니죠. 그렇지만 제가 진짜 운이 좋았어요. 코로나 시작할 때 헐값에 매수했는데 최근에 시드니 부동산가격이 폭등하면서 카페 상가 가격도 두 배 가까이 뛰었거든요. 아 맞다, 혹시 시드니 전집 굿즈도 관심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이건 영업 비밀인데, 1층이랑 2층은 카페로 운영하고, 3층에는 호주가 태생인 브랜드 굿즈만 판매하면서 소비자 경험에 집중한 공간을 만들어 볼 생각이거든요. 사람들이 꼭 호주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요."
"우와.... 정말 대단해요! 시드니 전집 굿즈라, 특별히 저한테도 기회를 주신다면 고민해 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호주에 시드니 전집 2호점이 곧 생기거든요. 뒤지개랑 채반이 반응이 좋으면 유통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 시드니 전집 굿즈면 당연히 기회를 드려야죠. 2호점 오픈 미리 축하드립니다."
주이는 새로운 시작을 앞둔 서로를 응원하는 대화를 나눈 뒤 폴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했다. 귀국하면 L카페의 플랫화이트를 마실 수 없어 아쉬운 마음에 원두라도 쟁여 갈 생각으로 들렀는데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폴은 광교에 있는 카페 오픈 전까지 참으라며 원두 1kg와 바나나브레드를 그녀에게 선물했다. 시드니에서 마시는 마지막 L카페 플랫화이트를 포장해 들고 나오며, 좋아하는 일을 진심을 다해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간 시간이 그 일을 성공궤도에 올려놓을 것이란 믿음을 폴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주이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모든 게 낯선 시드니에 정착할 수 있도록 가족처럼 도와준 딸의 친구 유리네 집에 초대를 받았다. 마당에서 소고기와 양고기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유리의 언니들과 민준, 민서, 제이는 어느새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돼 밤늦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헤어져도 줌으로 자주 통화하자며 서로가 준비한 선물과 편지를 주고받아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이와 주연은 유리의 부모님과 와인잔을 부딪히며 건배했다.
“귀국과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건배!"
‘새로운 시작’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 주이는 와인잔을 만지작 거리며 잠시 멍해졌다. 시드니에 전집을 차린 일은 새로운 시작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시작이 끝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든 게 불투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업 투자자인 유리 아버지 영탁은 멍한 주이를 향해 돌직구를 날렸다.
“이제 한국 돌아가시면 어떻게 지낼 생각이세요?”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일단 가서 생각하려고요. 하하... 저는 늘 이게 문제랍니다.”
“맞고 품는 것도 재주죠. 제가 몇 개월 간 보면서 느낀 건데, 사장님은 일단 결심하면 실천하는 능력만큼은 상위 1%이시던데요?"
“어머, 그런가요? 칭찬... 이죠?”
“그럼요. 칭찬입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장님처럼 엉덩이가 가볍지 않아요. 돈 버는 방법을 알려줘도 말로만 '해야지, 해야지...'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거든요. 근데 사장님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시드니에서 작별 선물을 하나 드릴까 하는데요.”
“선물이라뇨? 전 이미 여러모로 충분히 받았어요. 괜찮습니다.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것만도 차고 넘치는걸요.”
“물건은 아니고요, 흠... 분명히 오를 주식 종목을 하나 추천해 드리려고요. 사고 안 사고는 직접 결정하십시오.”
“유리 아버님 추천이라면 무조건 사야죠. 그 주식이 뭔데요?”
주이는 적당히 오른 취기에 칭찬까지 받아 기분이 좋았다. 주연은 취한 동생과 더 놀고 싶은 아이들을 간신히 택시에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주이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적도를 지나 부지런히 한국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