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이버링 Mar 24. 2024

스텔라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pilogue


더워지기 시작한 시드니와 달리, 이른 아침의 인천공항은 이른 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지난 8개월을 8년처럼 보낸 주이는 이방인이 돼 있었다. 마중 나온 진혁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고, 아이들은 아빠 품에서 기뻐 울었다. 하얗고 단단한 SUV 조수석 문을 여니 그제야 주이는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운전하는 남편의 옆에 앉아 24시간 전에 시드니에 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시드니에도 해가 떴겠지. 전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각자의 일상을 바삐 살고 있겠지.' 집으로 향하는 내내 창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꿈이었을지 모르는 시드니의 시간을 벌써부터 그리워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자 꿈에서 깬 사람처럼 놀라는 주이를 보고 진혁이 말했다.


"집에 오랜만에 오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지?"

"응. 전혀 낯선 곳에 온 것 같네? 후훗."


심지어 '집이 몇 층이었더라?' 잠시 고민했던 주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14층을 누르는 아이들이 신기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은은한 코튼향이 주이를 맞이했다. 진혁이 깨끗하게 정돈한 집은 포근해 보였지만 문득 천장이 이렇게 낮았나 싶어 금세 갑갑해졌다.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발을 들인 주이는 뻑뻑한 지퍼를 살살 달래 올리듯 일상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남편은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가족 중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주이 혼자였다. 6인용 식탁 모서리에 팔을 괴고 힘없이 앉아 지난 8개월을 복기했다. 두 시간 빠른 시드니에 있었다면 지금쯤 전집 문을 열고 첫 손님을 받을 시간이다. 제임스가 관리를 부탁한 시드니전집 2호점 SNS 홍보를 위해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시드니 전집에 방문했는데 매장이 사라졌어요.', '시드니 전집 망했나요?' 같은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주이는 시드니전집 2호점이 채스우드에 오픈했으니 꼭 방문해 보라고 주소를 남겼다. 이런 식으로 몇 개의 DM과 댓글을 처리하고 보니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커피를 안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폴이 선물한 원두를 꺼내 핸드 그라인더로 갈았다. 곱게 갈린 원두 위로 뜨거운 물을 붓는 순간 보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올라온 커피 향은 온 집안을 L카페로 변신시켰다.


문득 주이는 읽지 않은 편지가 생각났다. 다 풀지 않은 캐리어 속에서 문구 파우치를 꺼내 빨갛고 두툼한 편지봉투를 찾았다. 시드니전집이 곧 문을 닫는다고 매대 옆에 안내문을 붙여놨을 때, 단골 리사가 크게 아쉬워하며 주이에게 장문의 편지를 내밀었다. 시드니전집 2호점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주이는 영어로 썼을 리사의 편지를 뜯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편지가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_Stella, 네가 만들어준 따뜻한 전을 처음 먹은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음 너의 전집에 갔던 날, 나는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해 많이 외로운 날이었어. 나이가 많아서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그룹에 껴주지 않았고, 밥도 함께 먹어주지 않더라. 너무 이른 나이에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진짜 해보고 싶었던 일을 미뤄야 했지. 나는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공부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돼 학업을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한 날이었어. 처음 맡는 음식 냄새에 이끌려 너의 전집을 발견했고, 신기하게 생긴 김치전 한입을 '바삭' 베어 물었을 때 내 몸이 전율하면서 'Oh my goddess!'가 터져 나왔어. 나를 포기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배고픔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리고 신기하게 네가 전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어. 반죽을 나눠 붓고 적당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전을 뒤집는 부지런한 몸놀림은 예술과도 같았지. 너의 전은 나의 배고픔만 채워준 게 아니라 내 허전함까지 달래줬어.


Stella, 기억나니? ‘못생긴 전이 더 맛있는 거 알아요?’라고 네가 나에게 물었던 것 말이야. 그 말을 했던 날 하루종일 네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어.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몰라. 너는 내게 말했지. 하고 싶은 일을 하러 시드니에 와서 행복하다고. 그걸 해낸 너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그 말은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어. 너를 안 이후부터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어. 매일 수업을 마치고 너를 만나고 네가 전을 부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기다려졌어. 나는 거울을 보듯 너를 봤고 네 덕분에 한 학기를 끈기 있게 버틴 결과 'A'를 받았어. 결국 나를 무시하던 친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단다.


내가 너에게 큰 빚을 졌어.  어떻게 하면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고맙다고 말하는 나에게 너는 말했지. '리사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는 것. 그게 저에게 진 빚을 갚는 거예요.'라고. 나는 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거야. 그리고 호주에서 가장 멋진 주얼리 디자이너가 돼서 네 앞에 나타날게.


신의 가호가 너와 함께 하기를.


리사.


추신. 내가 만든 커플 목걸이를 늘 차고 있어주면 좋겠어.



주이는 카드 안쪽에 납작한 뭔가를 발견하고 꺼냈다. 호주산 오팔로 만든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은근한 하늘색이 튀지 않으면서 은색 모래 같은 테두리로 마감된 디자인은 과하지 않아 주이의 마음에 쏙 들었다.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걸어 보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리사를 태그 해 올렸다. 한참 뒤 그걸 확인한 리사는 잘 어울린다는 답장과 함께 자신의 목에 걸린 똑같은 목걸이를 찍어 보냈다. 언어가 달라도, 영어에 정(情)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어도, 주이는 그녀의 편지와 선물이 정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드니전집을 운영하는 동안 자신이 누군가의 삶에 이렇게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주이는 리사가 말을 걸어올 때 데었던 손가락 생채기들을 만지작거렸다. 수다스럽던 리사의 안경 낀 얼굴과 귀에서 딸랑거리던 두툼한 장신구들을 떠올리며, 그녀와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길 걸 하고 아쉬움의 한숨을 쉬었다.


전집의 단골들은 하나같이 시드니 전집의 폐점을 아쉬워했다. 현장에선 맛볼 수 없을 테니 냉동이라도 해서 먹겠다고 남은 전을 몽땅 포장해 간 레이첼, 새삼스럽게 레시피를 받아 적는 귀여운 엔젤라 할머니, 주이가 막내 동생처럼 예뻐했던 성실한 청년 헨리는 영업 마지막 날 납작 복숭아를 흰 상자에 가득 담아 빨간 리본을 묶어 주이에게 선물했다. 거기에는 비뚤 한 한글로 ‘당신은 정말 최고야.’라고 적혀 있었다. 주이는 육전과 파절임을 즐겨 먹던 헨리의 점심메뉴가, 서투른 막내 동생을 걱정하는 큰누나처럼 걱정이 됐다.


몸은 한국에 있는데 시드니 전집 루틴들이 주이를 엄습했다.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그녀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스스로가 버거웠다. 식용유와 튀김가루, 계란과 소금 등 재료가 넉넉한지 점검하고 영업준비를 했던 루틴이 주이의 몸을 떠미는 듯했다. 영혼이 기억하는 루틴들, 분명히 주이는 얼마 전까지도 뭔가를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고요한 집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뉴스에서 역대급 한파가 몰아칠 거라 하는데, 시린 겨울 내내 얼마나 쓸쓸한 겨울을 보낼지 두려웠다. 지금쯤 축제처럼 여름을 맞이할 시드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달아나고 싶어졌다. 동시대에 두 개의 우주를 사는 사람처럼, 몸은 한국에 영혼은 시드니에 있었다. 일상에 푹 절어 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주이의 이런 모습은 긴 여행의 후유증 정도로 보일 게 빤했다. 세상에 없던 유일무이한 날들은 오로지 주이의 세상에만 존재했다. 과거의 추억에 잠수하며 멍한 채로 며칠을 보냈다. 오랜만에 메일함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귀국한 지 2주쯤 지났을 때 주이는 아이들 학교에 제출할 체험학습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노트북을 켜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함은 주이가 한국에 온 것을 전혀 몰랐다는 듯, 시드니에서 보낸 메시지로 가득했다. 시드니대학 스포츠캠프, 시티 마켓 이벤트 알림, 루나파크 크리스마스 야간 개장 등 흥분되는 즐길거리가 그녀도 없는 시드니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무료 요가 클래스, 미술관 체험, 쿠킹 클래스 등 시드니에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신청했을 원데이클래스는 8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에 있는 주이를 유혹했다. 마치 이별 후에도 잘 사는 과거의 남자 친구를 미워하듯 시드니에 대한 서운함마저 밀려왔다. 자신과 무관한 이벤트를 애써 외면하면서 부지런히 스크롤을 내렸다. 체험학습 보고서에 증빙서류로 제출할 항공권 예약정보를 찾던 그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딸각’하고 멈췄다.


'출간을 제안합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출판사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아침햇살을 가린 구름이 떠났는지 거실 창으로 강렬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클릭을 하려다 말고 한참 동안 제목을 응시한 주이는 슬금슬금 커피가 당기기 시작했다. 궁금증을 미루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았다. 어쩐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메일은 오랜만에 주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천천히 커피를 내리며 기대감을 잔뜩 부풀렸다. 이 흥미로운 메일이 앞으로 그녀의 인생을 바꿔줄 거라 주문을 외우며 점잖게 앉아 이메일 제목을 클릭했다.


_안녕하세요. 저는 시대출판 영업본부장 김익수입니다. <갑(甲) 자기 사장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시드니에서 전집을 차리게 된 최주이 님의 히스토리가 궁금해 관련 인터뷰 기사를 찾아봤습니다. 방송과 기사로 접한 시드니전집 창업스토리가 흥미롭더군요. 혹시 그 경험들을 책으로 엮어볼 생각은 없는지요. 타국에서 전집을 창업하는 에피소드가 각박한 출퇴근길 독서하는 직장인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_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주이는 눈이 번쩍 떠졌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자녀들과 손주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대물림되는 ‘가문의 유산’이 되는 상상을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 책의 내용이 시드니전집이 될 거라 상상한 적은 없었다. 영업본부장이라는 사람은 만약 주이가 출간에 관심이 있다면 간단한 시놉시스를 보내달라며 <출간기획서> 양식을 첨부했다. 커피 한 모금을 들이마시며 주이는 기획서의 양식을 찬찬히 살펴봤다. 출간의도와 예상독자, 유사한 도서가 시중에 있는지 훑어보다가 어느새 그녀도 모르게 양식의 빈 공간들을 하나씩 채우고 있었다. 뜨거운 커피가 식는 줄도 몰랐다.



"뭐? 책을 낸다고? 와..."

"그렇게 됐어. 언니는? 언니는 호주 다녀와서 요즘 어때?"

"나... 두 번째 숙제가 좀 오래 걸렸지."

"숙제? 무슨 숙제?"

"너 기억 안 나? 호주에서 우리 아침산책할 때, 네가 숙제 내줬잖아.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아보라고. 대학원 말고."

"아! 그거, 생각났다. 아니, 그 숙제를 한 거야? 진짜?"

"응,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게 뭔데, 빨리 말해봐."

"내가 우연히 제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학부모 독서모임에 가게 됐는데, 아니 글쎄 엄마들이 벌써부터 그렇게 수학공부에 걱정이 많은 거야. 나야 중고등학교 수학 교사만 20년 넘게 했으니 상위권 아이들 공부습관은 꿰고 있지. 초등학교 때 어느 정도 학습이 돼 있어야 하는지, 나중에 심화 문제 잘 풀려면 어릴 때부터 공간 인지능력이나 문해력을 키워야 하고, 그래프로 그리는 미적분 문제를 풀려면 그림도 잘 그려야 된다는 거 말이야. 근데 다른 학부모들은 이런 걸 전혀 모르고 어느 학원이 좋네, 학습지는 뭐가 좋네 이러면서 막막해하더라고."

"뭐야, 그래서 독서모임 엄마들 수학 상담을 시작한 거야?"

"내가 '상담'이라는 단어의 덫에 갇혀있었나 봐. 네 말대로 방법을 좀 찾고 싶어서 끊임없이 나 자신과 대화를 했지. 근데 학부모들에게 현실적인 수학공부 방법에 대해서 지혜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는 거야. 내가 잘 아는 분야에 대해 말하는 게 신이 났어. 엄마들이 내 이야기 듣고 뭐라는 줄 알아?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대. 이것저것 물어보는 데 제이 픽업 시간이 다 돼서 다음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어. 제이를 데리러 가는데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더라. 내가 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느낌? 내 시간, 내 경험 남들에게 다 나눠주고도 이렇게 행복하다니. 그때 무릎을 탁 쳤지. 아, 이건 가보다. 주이가 말한 게."

"후훗. 언니가 진짜 그걸 깨달았다고?"

"솔직히 시드니까지 가서 사서 고생하는 널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젠 좀 알 것 같아. 사서 고생하더라도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 그 뒤로도 관심을 보이는 학부모들이랑 모임을 계속 가졌는데 만날 때마다 그 시간이 기다려지더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늘은 어떤 경험과 지혜를 나눌까 고민하게 되고 아이들 성향에 맞는 교재도 찾아보게 됐어. 게다가 주이야, 더 좋은 건 뭔 줄 알아? 그 모임 학부모 중에 영어 교사가 있었던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난 제이 수학은 하나도 걱정이 안 돼. 영어! 영어가 진짜 막막했거든. 근데 그분은 반대로 수학이 진짜 막막했는데 내 덕에 두려움이 많이 해소됐다며, 해외에서 유명한 영어학습 유튜브 채널도 알려주고 교재까지 나눠주시는 거 있지?"

"와... 소름 돋는다. 언니도 엄청 든든해졌겠는데?"

"응, 난 이 모임이 너무 즐겁고, 요즘 여기서 나누는 이야기가 내 삶의 낙이야. 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넌 책을 낸다니! 진짜 대단해, 내 동생. 사실, 갑자기 찾아온 이 감정이 오래가지 못할까 봐 조금 두려웠거든? 근데 널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 결국은 지금 이 마음이 계속 나를 앞으로 밀어주겠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좋아하는 일을 밀고 나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 아직 나오지도 않았어. 그런 칭찬받기는 아직 일러. 근데, 어쩌다가 내가 책까지 쓰게 된 건지 놀랍기는 해."

"그러게, 나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나도 <고등학교 수학교사가 알려주는 초등학교 수학공부법> 책 한 권 쓰고 싶어 지는데? 하하..."

"오, 그거 너무 괜찮은데? 나 그런 책 한 번도 못 봤어. 세상에 유일무이한 책이네. 언니, 책 쓰자. 고고?"


주연과 유쾌한 기분으로 통화를 마친 주이는 지난 시간들을 천천히 복기했다. 평범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호기롭게 도전한 시드니 전집은 주이를 부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그녀를 밀어주고 있었다. 주연이 한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이 감정이 오래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거든? 근데 널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 결국 지금 이 마음이 계속 나를 앞으로 밀어주겠구나.'


출판사 본부장은 출간기획서 양식을 받고 편집자를 한 명 붙여 주었다. 목차와 제목, 분량을 설정하고 주별로 목차에 맞게 숙제하듯 글을 써 나갔다. 실체 없는 경험 속에서 잠수하던 주이는 수면 위로 올라와 둥둥 떠오르는 기억들을 낚아 채 글로 썼다. 하교 후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할 때도 쓸 내용을 떠올리느라 음식의 간 보는 걸 까먹기도 했다. 아침해가 뜨는지도 모르고 날을 지새워 쓴 날도 있었다. 주이는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시드니의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전집을 차릴 수 있었던 반전 스토리, 한상무가 진상을 떨고 간 에피소드, 과거 헤어진 연인을 운명처럼 만난 사건, 워킹홀리데이 시절 아르바이트 했던 카페 사장님 덕분에 시드니 전집을 차릴 수 있었다는 소설 같은 스토리를 썼다. 지난 8개월의 추억을 혼자 부둥켜안고 지낸 며칠이 무색하게 시드니 전집의 역사가 착실히 글로 옮겨졌다. 간간히 찍었던 사진도 글 켜켜이 삽입했다. 글과 사진이 어우러지니 실체 없던 감동, 아쉬움, 흥분과 설렘이 글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기억들을 끄집어내면서 주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록할 거리가 넘쳐 난다는 사실은 입을 옷이 넘쳐나는 옷장 같았다. 



1개월 간 부지런히 쓴 원고의 제목은 <Stella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였다. 탈고를 마친 원고를 출판사로 넘기기 직전까지 수차례 고치고 다듬은 Epilogue를 마지막으로 훑어봤다. 


Epilogue, <Stella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17년 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지금 이 책을 쓰게 될 미래가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도시 중 시드니에 전집을 차렸으니 말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쓸모로 무궁무진하게 연결되는 것을 보면, 개인의 미래가 우주 어딘가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듭니다. 
휴직 중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 비용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찾아올 좌절감과 비난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믿음을 북극성 삼아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고 말았습니다. 그 믿음은 '어떤 결과도 실패는 아니다'라는 신념이었습니다. 8개월 만에 전집을 철수하게 됐고, 거창한 소득을 벌어들이지 못했으며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했습니다만, 북극성 덕분에 제 도전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시드니전집을 운영하며 쌓은 사업 노하우, 특별한 사람들과 맺은 인연, 두고두고 회상할 추억거리들, 과거 인연들과의 재회, 방송프로그램 출연 등... 이 모든 성과를 제쳐 두고 제가 어떻게 실패를 선언할 수 있을까요. 
시드니에 전집을 차린 목적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지나고 보니 저는 부자가 되기 위해 시드니에 간 것이 아니라, 세상 유일무이한 나만의 경험을 책으로 엮기 위해 시드니에 전집을 차린 게 아닐까요? 직접 보고 만지며 체득한 경험만이 오롯이 내 것이고, 그것만을 책으로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어떤 결과도 실패는 아니다'라는 제 신념이 옳았지요?

 이 시점에서 저는 궁금해집니다. 이 책은 또 어떤 미래와 연결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 이 인생이 내가 생각했던 그 인생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르게 살고 싶다면 오늘은 어제와 달라야 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시드니 전집의 바통을 이어받을 차례입니다.


에필로그만 여섯 번째 수정하느라 K편집자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안 고치셔도 될 것 같아요.'라는 K의 단호한 메시지를 받고 주이는 하는 수 없이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에요.'라 쓰고 7번째 에필로그를 발송한 뒤 노트북을 쾅 닫았다.

주이는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쓴다는 AI도구를 활용해 원하는 표지 이미지를 출력했다. 시드니전집 사진을 따뜻한 느낌의 수채화로 옮긴 것이었는데 출판사에서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 훨씬 고급스럽게 다듬어 주었다. 표지의 글씨체나 보정된 색감은 요즘 유행하는 힐링소설들의 구색을 전부 갖춘 느낌이었다. 주이는 시드니전집 인스타그램 계정에 책 표지와 곧 출간될 책의 소개글을 올렸다.


책은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솔직히 예약판매라니, 무명작가의 책을 보지도 않고 산다는 건 지인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출판사에서는 예약판매 기간을 '작가를 브랜딩 하고 책이 실제로 나오기 전 미리 소개함으로써 책 판매에 아주 중요한 인큐베이팅 기간'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주이는 책이 안 팔리면 어쩌나 조바심이 났다. 요즘 인플루언서가 책 홍보를 해주면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는데, 그녀가 아는 유일한 인플루언서 최재수는 애석하게도 SNS 계정이 없었다. 

출간 제의를 받은 이후 주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복직을 미루는 것이었다. 당연히 생계는 남편의 월급만으로 감당해야 했고 주이는 수입이 거의 없었다. 1000권의 책이 팔려도 주이의 손에 쥐어지는 인세는 세금을 제하면 150만 원 남짓이라고 했다. 그마저도 분기별로 지급한다니 주이의 주머니 사정은 갈수록 나빠졌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은 책을 사는데 지갑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출간 후 약 한 달 뒤 출판사로부터 도서 판매 실적을 들은 주이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까지 판매된 책이 1,000권도 채 안 된다고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분명히 베스트셀러 배지가 붙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매인증과 후기를 보내줬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책은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다.

  

"주이야. 책은 얼마나 팔렸어?"

"야, 최주이! 대단하다, 책을 쓰다니. 회사는 그만뒀어? 이제부터 유명해지는 거 아냐?"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고 TV에도 출연한 데다 책까지 출판했으니 주위에서 보기엔 주이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주이는 예상치 못한 적자에 시달리며 어떻게 생활비를 마련할까, 복직을 하루빨리 당겨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출간 이후 부진한 판매성적을 남편에게도 비밀로 한 채 살림과 육아에 쫓기며 공허한 일상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삶의 동기가 연소되니 이방인처럼 헛헛해졌다. 시드니전집을 글로 옮기는 내내 주이의 마음은 시드니전집에 있었으나, 이제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공중에 부유하는 깃털처럼 권태로운 일상을 보냈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강연 요청이 쇄도한다던데, 주이의 휴대폰은 예전보다 더 잠잠했다.

SNS에 광교 L카페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이 소란스럽게 공개됐다. 수많은 인플루언서가 카페에 방문해 대표인 폴과 함께 찍은 인증사진을 올렸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처럼 보였다. 하지만 폴은 주이에게 연락이 없었다. 두 달 전, 시드니전집 굿즈 아이디어를 폴에게 보냈고, 폴은 카페 공사로 바쁘니 천천히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주이는 담양산 소쿠리와 뒤지개, 독특한 디자인의 키친타월, 요리장갑, 앞치마 등을 굿즈로 제작하고 싶다고 제안서를 보냈다. 폴은 그 뒤로 주이에게 연락 한 통이 없었지만 주이는 틈틈이 떠오르는 굿즈 아이디어를 꼼꼼하게 보완해 다섯 차례 수정제안서를 보냈다. 폴은 주이가 보낸 메일을 확인만 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주이는 폴의 무반응이 서운했다. 이제 막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며 폴에게는 인플루언서의 카페 방문이 시드니전집 굿즈 개발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하지만 서운함은 뒤로한 채 그녀는 L카페 계정에 오픈 축하메시지를 남겼다.


며칠 후, 주이가 건조기에서 세탁물을 꺼내고 있을 때 예사롭지 않은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출판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작가님, 잘 지내시죠?

"네... 저는 뭐,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제 책은 잘 지내고 있나요? 하하..."

"네. 이제부터 아주 잘 팔릴 겁니다. 곧 2쇄 제작에 들어가려고요."

"네? 갑자기요?"

"다름이 아니고요, 작가님 책 말인데요, 오늘 넷플릭스 콘텐츠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작가님 책을 원작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힐링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데요, 지금 제가 이동 중이라 좀 바빠서, 자세한 사항은 메일 보내드릴 테니 읽어 보시고 다시 통화하시게요."


도대체 얼마나 바쁘면 이렇게나 중요한 사안을 메일로 보낸다는 것인지 주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음이 다급해진 주이는 건조기에서 꺼내던 빨래도 그대로 둔 채 휴대폰으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본부장이 보낸 메일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안 보냈을 확률이 높다. '내가 손이 너무 빨랐나?' 주이는 갑작스러운 뉴스에 흥분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때 '또깍' 소리가 나며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본부장이 보낸 메일이 아니었다. 발신자는 'Paul'이었다. 그가 보낸 메일 제목은 '제안서 검토 결과입니다.'였다.


'시드니 전집 굿즈 타당성 검토 결과 <합격>입니다. 사장님 마지막으로 수정하신 제안서, 아주 좋던데요? 3층에 제일 좋은 자리로 확보해서 진열할게요. 대량구매 견적서랑 거래명세서 확인하시고 연락 주세요. 아, 그리고 이번에 책 출판하신 것 정말 축하드립니다. 제가 주문해 놓고 너무 바빠서 아직 못 읽었는데, 혹시 제 이야기도 있나요? 하하... 카페는 언제 오실 건가요? 스텔라세트는 준비 됐습니다. 오셔서 책에 사인도 해주세요!'


주이는 폴이 보낸 메일을 읽고는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렸다. 스텔라세트까지 준비하느라 바빴을 폴에게 서운함을 느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견적서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이제 주이에게도 수입이 생길 거라는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다. 굿즈 견적서에 적힌 금액이 적지 않았지만, 광교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자신이 개발한 굿즈가 판매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회였기에 그녀는 돈을 벌기 전 남편에게 손을 먼저 벌려야 했다. 


"자기야, 내가 보낸 메일 봤어?"

"견적서는 잘 봤어. 대량구매라 그 정도면 가격도 나쁘지 않더라."

"오, 진짜? 그럼 자기가 이번에 시드니전집 굿즈에 투자 좀 해주는 거야?"

"에이, 무슨 소리야. 이제 드디어 수익실현할 때가 온 것 같은데?"

"무슨 말이야? 난 자기한테 손을 좀 벌릴라고 했는데, 수익실현이라니?"

"자기 한국 들어오기 전에 미주 샀잖아. N미디아, 기억 안 나?"

"맞다. 나 그때 산 거 있지. 근데, 그게 투자금이 얼마 안 돼."

"그니까 내 말이, 그때 더 많이 살 걸 그랬어. 그게 지금 10배나 폭등했잖아. 설마, 자기 몰랐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