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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Mar 23. 2024

죽은 시간을 살리는 방법

내가 있어야 할 곳


Jenny는 다른 일을 알아보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 호주로 돌아온 사장님 부부는 전집을 차렸던 한식당을 확장해 가게와 카페를 병행운영하는 대범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Jenny는 내 소개 덕에 그곳의 1호 매니저로 특별채용됐다. 벌써부터 고든카페에서 마셨던 커피를 다시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Jenny는 이제 나와 사장님 부부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아득했던 추억을 현재로 데려와 근사한 미래로 전달하는 징검다리. 

게다가 Jenny는 전집에서 촬영한 손님 응대 영상이 소위 대박을 터트린 덕분에 어학원 홍보대사 제안도 받았다. 해외 각국에 지사를 둔 온,오프라인 어학원의 얼굴이 된 Jenny는 사장님 부부의 동의를 구해 이후로도 카페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돈도 벌고 영어실력도 극적으로 향상되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Jenny의 워킹홀리데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Jenny가 처음 나에게 "전집 아르바이트 장면을 휴대폰으로 찍어 올려도 될까요?"라고 물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그때 Jenny의 시도를 막았더라면 지금의 Jenny와 나는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훌륭한 사장은 일을 잘 시키는 사장이 아니라 직원이 성장하도록 돕는 사장이라는 말.

시드니전집 1호점은 문을 닫기로 결정했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시드니전집 2호점과 3호점은 맨리비치와 채스우드에 각각 오픈하게 됐다. 호주에 부동산을 대량 보유한 이민 2세 James는 시드니전집 프랜차이즈를 두 곳이나 한 번에 내고 싶다고 욕심을 냈다. 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전집을 한 곳도 아니고 두 곳이나 욕심낼 수 있을까? 전집이 TV에 좀 나왔다고 무모하게 결정한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살짝 떠 보았다.

“시드니전집이 방송에 나오긴 했지만 시드니에 두 곳이나 차려도 잘 될 만큼 홍보가 충분한 것 같지 않아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네? 전집이 방송에 나왔나요?”

“네...방송 보고 프랜차이즈 문의 주신 것 아닐까요?”

“네... 저는...”

놀랍게도 이 모든 걱정은 기우였다. James는 무엇보다 내 전이 맛있었고, 기교를 부리며 노련하게 전을 뒤집는 모습이 사업을 결심한 킬링포인트였다고 말했다. 요즘 뜨는 맛집들의 공통점은 고객들에게 ‘먹는 즐거움’ 뿐 아니라 조리장면을 ‘보는 즐거움’까지 선사하는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경험에 투자하는 요즘 사람들의 니즈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고 한다. 방송에 나왔다는 사실 쯤은 그에게  그다지 큰 이슈가 아닌 듯 보였다.

James는 당분간 시드니전집 SNS 홍보를 맡아줄 것과 2호점, 3호점 컨설팅을 해주는 대가로 내게 사례금을 두둑이 챙겨줬다. 나는 그 돈으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샀고, 그간 낸 집렌트비, 전집 임대료 등에 두둑해진 마이너스 통장을 최초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나중에 가족과 함께 시드니에 놀러오면 자기가 아끼는 별장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James가 나에게 사례한 돈보다 반갑고 기대되는 보상이었다. 

"이제 Paul이 만든 L카페의 플랫화이트를 맛볼 수 없게 되어 슬프네요. 바나나브레드도 그리울 거예요."

"글쎄요,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저도 곧 한국으로 돌아가 L카페를 광교에 오픈하기로 했거든요. 신규 오픈하면 꼭 놀러 오세요. 바나나브레드는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어머나! 너무 잘 됐어요. 지난번에 속상해하셔서 걱정했는데, 결국 잘 됐군요?"

"네. L카페 단골 고객 중에 꽤나 손이 큰 투자자가 계신데, 시드니 본점을 좋은 가격에 넘기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해 보라고 제안해 주셨어요. 시드니 관광객들이 제가 만든 굿즈들을 선물로 많이 사가고, 인플루언서들이 애용하기 시작하면서 수요가 꽤 늘었거든요. 오랜 고민 끝에 광교 노른자 상권 3층 짜리 건물에서 제가 오랫동안 꿈꾸던 플래그십 스토어를 시작하기로 했어요."

"세상에나, 정말 축하드려요. 광교 신도시 중심상권에 3층짜리면 어마어마하게 비쌀 텐데, 그런 노른자 상권에 L카페가 생긴다니, 성공은 따 논 당상이겠군요."

"운이 좋았던 게, 코로나 시작하고 헐값에 매수한 카페점포가 코로나 끝나고 시드니 부동산 폭등 덕에 L카페를 좋은 가격에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광교에 전폭적인 투자를 용기 낼 수 있었고요. 아 맞다, 혹시 시드니 전집 굿즈도 관심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광교점 3층에는 팝업스토어 형식으로 호주가 태생인 굿즈만 판매하면서 소비자 경험에 집중한 공간을 만들어 볼 생각이거든요."

"시드니 전집 굿즈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너무 괜찮은 아이디어인데요? 

L카페에 들러 Paul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했다. L카페에서 마시는 마지막 플랫화이트를 포장해 들고 나오며, 좋아하는 일을 진심을 다해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간 시간이 그 일을 성공궤도에 올려놓을 것이란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렇게 멋진 사장님과 그가 만든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경험조차도 시드니가 나에게 준 선물인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까지 걸으며 시드니 전집 굿즈는 뭐가 좋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지막으로 그간 나를 도운 은인들에게 줄 선물도 부지런히 준비했다. 부자가 되면 빚을 갚고 싶다는 다짐은 무색해졌지만, 기쁜 마음으로 한 명 한 명에게 선물을 전하며 울컥했다. 특히 모든 게 낯선 시드니에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시간과 마음을 내어준 J네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집에 초대해 저녁을 대접해 주셨다.

"보탬이 될 수 있어서 저희도 행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눈물이 터졌다. 전업투자자라는 J부모님은 재력만 넉넉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넉넉하고 배울점이 많은 분들이었다.

“이제 한국 돌아가시면 어떻데 지낼 생각이세요?”

“글쎄요, 일단 가면 뭘 할지 보이겠죠? 하하... 저는 늘 이게 문제랍니다.”

“그래도 제가 알고 지내면서 느낀 건데, 뭔가를 결심하면 즉시 실천하는 능력은 굉장히 탁월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시드니에서 마지막 선물을 하나 드릴까 하는데요.”

“선물이라뇨, 괜찮습니다.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것만도 차고 넘치는 걸요.”

“물건은 아니고요, 분명히 오를 주식 종목을 하나 추천해드릴게요. 사고 안 사고는 직접 결정하십시오.”

나는 그간 추천받은 종목을 안 사서 후회만 가득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망설이면 기회를 놓친다’는 마음으로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 종목을 즉시 매수했다. 와인 한 잔에 오른 취기가 빠른 실행을 거들었다.

소고기를 한 겹 한 겹 준비해 주신 한인 식육점 사장님, 애초에 불가능했던 시드니전집을 기적처럼 가능하게 만들어 준 수지, 내 전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엄치척을 내밀었던 수많은 단골손님들에게 마음을 담아 쓴 Special Thanks 편지와 함께 소소한 선물을 전달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연락하고 지낼 것을 약속하며, 잠시만 이별하자고 아쉬움을 묻었다.

소중한 아이들과 한국에 있는 남편,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수차례 물은 결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시드니가 아닌 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아빠의 자리를 무한정 비워둘 수 없었고,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낸 시간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전집을 차려봤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원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나는 몸소 이뤘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다했다. 일부러 여기서 더 새로운 일을 벌리고 싶은 마음은 남김없이 비웠다. 자식 같은 2호점과 3호점을 시드니에 남기고 돌아가게 됐으니 아쉬움도 덜했다. 여자사장님은 우스갯소리로 Jenny에게 가게 일부 공간을 내어줄 테니 시드니전집 본점(1호점)을 계속 운영해 보라고 부추겼지만 전부치는데 이골이 난 Jenny는 손사래를 쳤다.

아쉽게도 최재수를 등에 업은 나의 인기는 금세 식어버렸고, 2호점, 3호점 이후로는 전집 창업문의가 꼬리를 감췄다. 잡지나 강의, 토크쇼, 홈쇼핑 등 출연 문의를 했던 사람들도 내가 방영일로부터 한 달 남짓 후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드렁했다. <갑(甲)자기 사장님> 최재수 편의 인기는 뒤이은 다른 배우의 에피소드에 밀려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급격하게 늘어난 팔로워도 시드니 전집 2호점과 3호점을 홍보하는 나의 피드에 유령처럼 반응했다. 빠르게 소비되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내가 스크린 밖 그림자들에게 소비되고 버려진 것 같아 허탈감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실체도 없는 타인의 관심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니 위로가 됐다.

달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추락한 기분이다. 아니, 애초에 달까지 갈 수 있다고 착각하며 이런 일로 두근거렸던 내 심장을 꾸중했다. 소인배처럼 남의 인기를 등에 업고 부자가 될 상상을 하다니,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출국을 사흘 앞 둔 어느 날 괜시리 헛헛한 마음에 맥주 한 잔을 비우고 마지막이 될 달링하버 산책을 나섰다. 물 위에 비쳐 너울대는 시티의 빌딩숲이 아름다웠다. 주말이면 화려한 불꽃놀이가 열리는 이곳. 원한다면 매일 볼 수 있었는데,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리워 할 풍경들을 욕심내어 눈에 담고는 달링하버 데크에 쭈그려 앉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뭐해?”

“응, 밥도 못 먹고 야근중. 넌 어디야? 시끄러운데?”

“달까지 못 가고 추락했어.”

“...”

“시드니에 전집 차리고, 부자가 되겠다고 의기양양 떠났는데, 결국 제자리지 뭐야...”

“제자리도 어디야.”

“그걸 위로라고 하는거야?”

“...”

“지금 나한테 이 말 하고 싶지? 거 봐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

“왜 내 말에 자꾸 대꾸를 안 해? 나 정말 속상한데...”

달에 갔네, 못 갔네 하며 취기 섞인 푸념을 쏟아내는 나에게, 저녁도 못 먹고 야근중인 남편은 한참의 침묵 뒤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얼른 들어와. 네가 성공하고 안 하고는 안중에도 없어. 사실 나, 너도 애들도 정말 많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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