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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Mar 24. 2024

스텔라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pilogue


더워지기 시작한 시드니의 날씨와 달리, 인천공항은 서둘러 찾아온 추위로 나를 맞이했다. 가을 중에서도 가장 춥다는 수능 시험 날 입국하는 바람에 몸을 파르르 떨어야만 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나는 우리집 천장이 이렇게 낮았나 싶었다. 지난 8개월을 8년처럼 보낸 내가 금세 우리집에서 이방인이 돼 있었다. 뻑뻑한 지퍼를 살살 올리듯 다시 일상에 나를 끼워 맞추는 일은 내키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이방인으로 살 수는 없었다.

남편은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가족 중 갈 곳이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기다란 6인용 식탁 모퉁이에 팔을 괴고 쓸쓸하게 앉아 지난 8개월을 복기했다. 두 시간 빠른 시드니에 있었다면 지금쯤 전집 문을 열고 첫 손님을 받을 시간이었다. 간간이 James가 요청한 시드니전집 2호점과 3호점의 SNS를 관리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전을 부치는 것도 아니라 수입은 없지만 James는 내가 명실공히 시드니 전집의 사장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이렇게라도 시드니전집에 발을 담글 수 있어 감사했다.

시드니전집 본점이 곧 문을 닫는다고 파란 글씨로 인쇄해 매대 옆에 붙여놨을 때, 만학도 단골 leesa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며칠 뒤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 읽고 집에서 엉엉 울었다. 언어가 달라도, 영어에 '정(情)'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어도 나는 그녀의 편지에서 우리가 나눈 것이 ‘정(情)’이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평범한 전집의 사장 이상으로 나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Stella, 네가 만들어준 따뜻한 전을 처음 먹은 날, 사실 나는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해 많이 외로운 날이었어. 나이가 많아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그룹에 껴주지 않았고, 밥도 함께 먹어주지 않더라. 공부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어. 처음 맡는 음식 냄새에 이끌려 너의 전집을 가게 됐고, 바삭한 전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Oh my godness!' 를 외쳤지. 외로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날은 배가 많이 고팠지만 너의 전은 나의 허기만 채워준 게 아니라 외로움까지 달래줬어.


Stella, 기억나니? ‘못생긴 전이 더 맛있는 거 알아요?’ 라고 네가 나에게 했던 질문 말이야. 그게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몰라. 너를 안 이후로 매일 활짝 웃는 너와 나누는 대화는 내 하루의 비타민이 됐고 한 학기를 끝마칠 수 있었어. 그러니 나는 너에게 큰 빚을 졌어. 내가 빚을 갚을 수 있게 우리 꼭 다시 만나! 신의 가호가 너와 함께 하기를.

추신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You saved my life.(네가 날 살렸어.)‘

내가 여기서 누군가의 삶에 이렇게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그녀가 쉼없이 내게 말 걸어온 순간들을 떠올리고는 대화를 나누다 데인 손가락 생채기들을 만지작거렸다. 수다스럽던 Leesa의 안경 낀 얼굴을 떠올리며,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길 걸, 매대에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이 세월에 바래지지 않기를 바랐다.

시드니전집 단골손님들은 하나같이 폐점을 아쉬워했다. 냉동해서 먹어야겠다고 조리된 전을 몽땅 포장해 가는 아저씨, 새삼스럽게 레시피를 받아 적는 귀여운 할머니도 있었다. Henry는 마지막 영업 날 내가 좋아했던 납작 복숭아를 흰 상자에 담아 빨간 리본을 묶어 선물했다. 거기에는 비뚤한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은 정말 최고야.’

시드니전집의 단골손님과 매대 앞에 섰을 때 보이던 장면, 그리고 나의 전집 루틴들이 쉼 없이 나를 들썩이게 했다. 지난 시간 나는 분명히 뭔가를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우두커니 앉아있다. 시린 겨울을 앞두고 나는 또 한국에서 얼마나 쓸쓸한 겨울을 보낼까 걱정스러웠다. 지금쯤 시드니는 여름을 맞이하고 있을 텐데.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사는 지인들에게 내 고민이 한가하고 시시콜콜하게 느껴질까 봐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세상에 없던 유일무이한 경험을 했던 날들. 그날들은 오로지 나 혼자만 공감할 수 있었다. 실체도 남아있지 않은 과거의 추억 속에 잠수하며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오랜만에 메일함을 열어보기 전까지 전과는 다른 죽은 시간을 보냈다.

월요일 아침, 아이들 학교에 제출할 체험학습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오랜만에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함에는 시드니의 흔적이 그득했다. 시드니대학 스포츠캠프, 시드니 시티 마켓, 루나파크 야간 이벤트 등 흥분되는 즐길거리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료 요가 클래스, 미술관 체험, 쿠킹 클래스 등 클릭을 유도하는 흥미로운 문구들이 나를 잡아당겼다. 한국에 돌아온 뒤 내 시계는 다시 멈춘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없는 시드니는 언제 내가 거기에 있었냐는 듯 얼마든지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별에도 잘 사는 과거의 남친을 대하듯 시드니에 대한 서운함마저 밀려왔다. 더 이상 나와 무관한 이벤트가 또 한 번 나를 우울하게 만들까 봐 애써 외면하고 부지런히 스크롤을 내려 항공권 정보가 있는 이메일을 뒤졌다. 그러다 갑자기 낯선 문구가 눈에 들어와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딱’하고 멈췄다.

'출간을 제안합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출판사에서 보내온 메일이었다. 아침햇살을 가린 구름이 떠났는지 거실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메일을 열어보지 않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았다. 바삭함이 간절해져 냉동실에서 아껴둔 소금빵을 꺼내 레인지에 해동 후 토스터기에 넣었다. 거실이 온통 커피와 구운 빵의 향기로 가득 찼다.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듯 아까 본 이메일을 징검다리 건너듯 살며시 클릭했다.

시드니에서 촬영한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연락했다는 본부장은 시드니 전집을 창업한 스토리를 힐링서로 엮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낯선 곳에서 전집을 창업하는 과정과 그곳의 에피소드가 요즘처럼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출퇴근길 책 읽는 직장인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 거라 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출간 제의가 오다니, 신기한 마음에 눈이 번쩍 트이며 마음이 들썩였다.

죽기 전 내 이름으로 낸 책 한 권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은 있었다. 내 삶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아이들과 손주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읽히는 ‘가문의 유산’이 되는 상상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주제가 ‘시드니전집’이 될 거란 시나리오는 없었지만 어떤 방식이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출간에 관심이 있다면 간단한 시놉시스를 보내달라며 <출간기획서> 양식이 첨부돼 있었다. 버터향 가득한 소금빵 한입을 베어 먹으며 양식을 찬찬히 살펴봤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양식의 빈 공간들을 하나씩 채우고 있었다. 뜨거운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몰랐다.

쓰고 또 썼다. 나만 기억하는, 실체 없는 경험 속에서 잠수하던 나는 둥둥 떠오르는 기억들을 글로 생포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아이들 픽업 시간에 운전을 할 때, 예고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들을 열심히 체포했다. 운전 중에는 음성인식 받아쓰기 기능의 도움을 받았다. 스마트폰이 엉터리로 받아 적은 오타 투성이 글들은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 노트북에 가지런히 정돈됐다. 아침해가 뜨는지도 모르고 날을 지새워 쓴 날도 있었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많은 이야기들을 혼자 부둥켜안고 지낸 며칠이 무색하게 시드니 전집의 역사가 착실히 글로 옮겨졌다. 나중에는 간간히 찍었던 사진도 글 켜켜이 삽입했다. 글과 사진이 어우러지니 실체 없던 감동, 아쉬움, 흥분, 설렘, 편안함, 게으름, 나태함 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기억들을 끄집어내면서 콧노래가 나왔다. 기록할 거리가 넘쳐 난다는 사실은 냉장고에 먹을 것이 그득한 것과 비슷한 든든함을 줬다.

쓰는 순간, 룰루레몬 레깅스를 입은 내가 다시 하이드파크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쓸 때마다 행복해졌고, 산책 후 들렀던 L카페의 시간을 회상하다가 불현듯 Paul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혹시 시드니 전집 굿즈에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그래! 그거야."


탈고를 마친 책의 제목은 <Stella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로 최종 결정이 났다. 출판사로 원고를 넘기기 직전까지 수차례 고치고 다듬은 Epilogue를 마지막으로 훑어봤다. 


Epilogue, <Stella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17년 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지금 이 책을 쓰게 될 미래가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고 많은 도시 중 시드니에 전집을 차렸으니 말입니다. 운명론을 믿지는 않습니다만, 반평생을 살고 보니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쓸모로 무궁무진하게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퇴사를 결심하고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 비용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느끼게 될 좌절감과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믿음을 북극성 삼아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고 말았습니다. 그 믿음은 '어떤 결과도 실패는 아니다'라는 신념이었습니다. 비록 8개월 만에 '성공했다'라고 할만한 거창한 소득을 벌어들이지 못했고 퇴직금도 회수하지 못했습니다만, 그건 실패일까요? 시드니전집을 차리고 운영하며 쌓은 사업 노하우, 좋은 사람들과 맺은 인연, 평생 꺼내어 회상할 수 있는 추억들, 과거 인연들과의 재회, 방송프로그램 출연 등... 이 모든 사건 중 어느 것도 저에게 실패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는 위에서 언급한 시드니전집의 모든 서사가 담겨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저는 부자가 되기 위해 시드니에 간 것이 아니라, 세상 유일무이한 나만의 경험을 책으로 엮기 위해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고 지난 8개월을 보낸 것이더군요.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며 체득한 경험만이 오롯이 내 것이니 말입니다. '어떤 결과도 실패는 아니다'라는 제 신념이 옳았습니다. 최초 목표한 바와 달랐지만 플랜 B는 저를 출판으로 이끌었습니다. 죽기 전 내 이름으로 책 한 권 출판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궁금해집니다. 이 책은 또 나에게 예비된 어떤 미래의 동기가 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말을 꼭 기억하세요. 어떤 결과도 실패는 아닙니다. 더불어 독자분들이 시드니전집의 바통을 이어받고 달리게 될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궁금해집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에필로그만 여섯 번째 수정하느라 편집자님의 인내심도 바닥이 드러났다. '이제 안 고치셔도 될 것 같아요.'라는 단호한 메시지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메일 전송 버튼을 과감하게 누르고 노트북을 닫았다. 

출판사 사람들과 내가 만장일치로 정한 책 표지는 시드니전집 사진을 따뜻한 느낌의 수채화로 옮긴 것이었는데 마치 내가 거기 있는 듯 마음에 쏙 들었다. 글씨체나 색감을 볼 때 요즘 유행하는 힐링소설들의 구색을 전부 갖춘 느낌이었다. 나는 SNS에 내 책의 표지를 올려 기대감을 높였다.

책은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솔직히 예약판매라니, 나같이 이름도 없는 작가의 책을 보지도 않고 산다는 건 지인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출판사에서는 예약판매 기간을 '작가를 브랜딩 하고 책이 실제로 나오기 전 미리 소개함으로써 책 판매에 아주 중요한 인큐베이팅 기간'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마뜩치않았다. 그래도 나는 SNS에 예약판매가 시작되었음을 서둘러 알렸고, 가까운 지인들과 최재수를 비롯한 <갑(甲)자기 사장님> 제작진들이 도서 구매 인증 사진을 보내주었다. 감사하게도 지인 중에서는 수십 권을 한 번에 구매하거나 지인의 지인까지 선물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약판매의 기대감은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나는 부와 명성을 거머쥘 수 있을 거라 마음속에 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기대감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처럼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철없고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 구천 원 짜리 책 한 권을 팔면 저자가 할당받는 인세는 8%, 고작 천 오백 원 남짓이었다. 고마운 지인들은 약 200권의 책을 예약판매 기간에 구매해 줬다. 이후 판매실적은 오롯이 책의 일이다.

글을 쓰면서 행복했지만 누구 말마따나, 솔직히 출간은 출산의 고통에 맞먹는 일이었다. 출간 제의를 받은 이후 제일 먼저 복직을 미뤘다. 퇴고를 서둘러 마치느라 아이들 학원 픽업을 놓치기 일쑤였고, 해가 지도록 밥을 안 해 저녁 식사를 배달 음식으로 번번이 때워야 했다. 처녀작이 부끄럽지 않도록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느라 시간이 늘 부족했다. 글을 쓰느라 들인 수고에 비해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은 턱없이 적었다.

사람들은 내 책을 사는데 지갑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2021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50%는 책을 아예 읽지 않고, 읽는다 해도 1년에 읽는 책이 10권도 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베스트셀러도 아닌 내 책을 일부러 사 읽을 리 만무했다. 초판 1쇄 3000부가 다 팔려도 세금을 떼면 손에 쥐어지는 돈은 겨우 백만 원 남짓인데, 출판 후 삼 개월이 지나 출판사로부터 받은 판매성적은 처참했다. 1쇄 완판의 꿈은 와르르 무너졌고, 예약판매를 합쳐 팔린 책이 1,000권도 채 안 된다는 소식에 좌절하고 말았다. 

"책은 얼마나 팔렸어?"

"대단하다, 책을 쓰다니. 회사는 그만 뒀어? 이제부터 유명해지는 거 아냐?"

이런 가혹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기 괴로워 외출도 말수도 크게 줄었다.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고 TV에도 출연한 데다 책까지 출판했으니 주위에서 보기엔 내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마땅한 수입이 없어 어떻게 생활비를 마련할까, 복직을 하루 빨리 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 짜는 중이었다. 어떤 날은 멍하니 앉아 온라인 서점에 서평이 달리는지, 내 책의 후기가 올라오는지 넋놓고 찾아보느라 할 일을 놓치기 일쑤였다.

퇴고를 마치고 나는 즉시 시드니전집 굿즈 개발에 착수했다. 정리돤 굿즈 아이디어를 L카페 사장 Paul에게 전달했고, Paul은 별말없이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소쿠리와 뒤지개, 키친타올, 요리장갑, 앞치마 등이 시드니 전집 굿즈 후보로 올랐다. Paul은 일단 광교 건물 공사와 커피 유통 시스템 구축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상황이라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아이디어를 보낸 지 한 달이 넘도록 답이 없어 마음이 공허하고 허탈했지만, 틈틈이 떠오르는 굿즈 아이디어를 보완해 지금까지 총 5번 제안서를 수정해 보냈다.

출간 이후 부진한 판매성적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살림과 육아에 찌든 공허한 일상을 이어나갔다. 출판 이후 삶의 동기가 연소되니 이방인처럼 헛헛해졌다. 지난 시간들을 글로 재현하기 위해 글을 쓰는 내내 내 마음은 시드니전집에 있었으나 정신을 차려 보면 한국의 현실이었다. 시드니 굿즈 아이디어를 짜낼 때 나는 시드니 전집에 있는 것 같았지만, 한 달 째 묵묵 부답인 Paul을 기다리는 일로 나는 지쳐만 갔다.

이제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공중에 부유하는 깃털처럼 권태로운 일상을 보냈다. 베스트셀러가 되면 강연 요청이 쇄도한다던데, 휴대폰은 잠잠했다. SNS에 광교 L카페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이 소란스럽게 공개됐지만 Paul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Paul은 바쁜 일정 탓에 내 굿즈 따위는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예사롭지 않은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출판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작가님, 잘 지내시죠?

"네... 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 책은 잘 팔리고 있나요? 하하..."

"네. 아주 잘 팔릴 겁니다."

"네?"

"다름이 아니고요, 작가님 책 말인데요, 오늘 넷플릭스 콘텐츠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작가님 책 스토리를 배경삼아 넷플릭스 오리지널 힐링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엮어보고 싶다는데요, 지금 제가 아주 바빠서, 자세한 사항은 메일 보내드릴 테니 읽어 보시고 추후 논의하시죠. “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본부장의 전화를 끊고 즉시 메일함을 열었다. 내가 손이 너무 빨랐나? 본부장은 아직 메일을 나에게 전달하지 않은 듯했다. 곧 보내겠거니 하고 메일함을 열어놨는데 '또깍' 소리가 나며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본부장이 보낸 메일이 아니었다. 발신자는 'Paul'이었다. 그가 보낸 메일 제목과 미리 보기 첫 줄을 한눈에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시드니 전집 굿즈 타당성 검토 결과 <합격>입니다. 대량구매 견적서 및 거래명세서 첨부하오니 확인하시고 연락....'

나는 몇 분 뒤 도착한 본부장님의 메일과 Paul의 메일을 읽고 또 읽으며 벅찬 가슴을 누르느라 하루를 몽땅 소진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견적서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굿즈 견적서에 적힌 금액이 적지 않았지만, 핫하다는 광교 플래그십 스토어에 공개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도전이었기에 나는 남편에게 손을 벌리기로 했다. 남편은 내가 보낸 견적서를 잘 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견적서 잘 봤어. 대량구매라 가격도 나쁘지 않아. 이제 드디어 지난 번에 J아버님 추천종목, 수익실현할 때가 온 것 같은데?"

"무슨 말이야? 수익실현이라니? 아... 한국 오기 전에 샀던 그 미주 말이야?"

"그래, 그게 지금 4배나 폭등했잖아. 설마, 자기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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