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아이가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꿈속에서 나는 다른 비행기를 탔다. 아이가 탄 비행기는 참사를 당했다.
새벽에 잠에서 깨 엉엉 울었다. 내 옆에 곤히 잠든 아이의 볼과 머리카락을 손으로 더듬고도 꿈과 현실을 오가며 흐느꼈다. 어째서 나는 너를 혼자 뒀을까, 어째서 나는 그 비행기에 너를 혼자 태웠을까. 너는 엄마를 얼마나 애타게 불렀을까. 꿈에서라도 공포 속에 너를 혼자 둔 나 자신이 미워 나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멍청한 년, 넌 죽어도 싸...’라고 말하며.
어두운 새벽에 시체처럼 누워 다시 잠들지 못한 채로, 꿈속 흐느낌의 이유를 찬찬히 복기했다. 아이와 이별했다는 슬픔보다 잔인한 고문은, 비행기 속에 갇혀 공포에 떨며 죽음으로 빠르게 향하는 아이의 겁먹은 잔상이었다. 내가 차라리 너를 끌어안고 죽었으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해도, 그래도 그 공포에 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었다면, 어찌나 선명한 꿈이었는지 후회를 뼈에 새기며 다짐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모처럼 떠난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한국은 난리가 났어.”
“왜? 두 번째 계엄이라도 난 거야?”
“아니...”
사람들은 내 여행이 즐거웠냐고 묻는 대신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안부를 했다.
언니는 매일 안부를 묻던 친구를 잃었다. 나는 언니와 통화하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매일 같이 밥은 뭐 먹었냐고, 여행에서 언제 돌아오냐고, 어서 만나자고 보내고 받은 메시지들이 다 유언이 됐네.”
언니는 친구와 카톡으로 주고받은 메시지를 하나하나 떠올려내며 흐느꼈다. 그랬구나... 언니에게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었구나.
어쩌면 우리는 매일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한다. 처음 만난 사람을 영영 못 보기도 하고, 가까웠던 누군가와 육체적으로, 법적으로 혹은 마음으로 이별한다.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 수록된 글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예방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매일 유언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유언으로 남아도 손색이 없는 말을 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카톡 메시지, 전화를 끊으며 남기는 말들, ‘내일 봐.’하는 사소한 인사까지도 따뜻한 유언이 되는 말을 해야겠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탈함에 감사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함께 가슴 아파하는 것일까. 위로에 대해 배운 적 없지만, 슬퍼하는 법을 공부한 적도 없지만, 언제가 찾아올 이별을 위해 매일 아름다운 유언을 연습하는 것.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님과 동료들에게, 그저 스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을 나의 따뜻한 말들을 연습하는 것. 수많은 방식의 애도 중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애도가 아닐까.
새해 첫 브런치 글에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여객기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