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할 칭찬이라면
호주에서 먹었던 *사워도우(Sourdough) 빵이 몹시도 그리웠다. (*사워도우는 천연 발효종을 이용해 장시간 천천히 발효시키기 때문에, 천연 발효 과정에서 생성된 유산균과 효모가 장내 건강한 미생물을 증진시키고 소화를 돕는 건강한 빵이다.) 사워도우는 올리브유에 바짝 구워 쫀득하게 뜯어먹는 맛이 일품이다. 한국에서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동네 빵집 곳곳을 기웃거려 봤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비슷한 생김새의 빵은 있어도 같은 맛은 없었다. 검색 범위를 동네에서 도시 전체로 넓혀 ‘광주 사워도우 맛집’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 결과 양림동의 빵집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사워도우가 간절하게 먹고 싶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일단 집에서 차로 15분쯤 걸리는 그 빵집에 가서 사워도우 2개를 포장해 왔다.
달군 팬에 올리브유를 붓고 튀기듯 구웠다. 접시에 꺼내 열기를 빼고 겉바속촉한 토스트로 만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 이 맛이야." 고기를 씹는 듯 감칠맛이 났다. 한 번은 발뮤다 토스터기에 물을 조금 넣고 3분 간 구운 뒤 발사믹&올리브유에 찍어 먹었다. 담백하고 향긋하다. 너무 질기지도 않고, 거북한 밀가루 향도 나지 않았다. 겉이 너무 두꺼우면 씹기 거북스러운데 이곳의 사워도우는 두께가 내 입맛에 알맞았다. 마침내 완벽하게 마음에 쏙 드는 사워도우를 발견한 것이다. 유레카!
당시 휴직 중이라 수입이 없던 나에게 1개에 무려 7천 원이라는 간식값은 사치스러운 구매였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상당해서 서너 번에 걸쳐 나눠먹을 수 있었고, 먹을 때마다 호주를 떠올릴 수 있어 호사스러웠다. 이거야 말로 나 자신에게 하는 확실한 선물이고 소확행이다. 냉동실에 밀봉해 저장해 둔 사워도우는 호주가 그립고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꺼내 먹을 든든한 상비약이 됐다.
부지런히 먹고 남은 네 조각의 사워도우는 오늘 제 명을 다했다. 한 조각도 허투루 먹지 않았다. 오늘도 가장 맛있는 방법으로 나를 호강시켰다. 더 이상 꺼내먹을 사워도우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즉시 공허해졌다. 당장 먹을 것도 아니면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 빵이 간절할 때 냉장고에 남은 빵이 없다는 사실을 미래의 내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키를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헛걸음을 하고 싶지 않아 사워도우가 매장에 남아있는지 전화로 확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사워도우 두 개 컷팅해서 포장해 주세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는 건네받은 카드로 결제를 마치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 그녀가 빵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럼 사장님은 누굴까? 누가 빵을 굽는 걸까? 호기심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방을 힐긋거렸다. 마침 마른 체구에 안경을 쓴, 나이는 50대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내 뒤를 이은 손님이 음료에 대해 물으니 젊은 여자의 설명을 거들고 있었다.
'저분이 사장님이군.'
나는 사장님을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인생 사워도우를 사 먹을 수 있게 해 주신 은인에게 구름을 태워드리면 어떨까! 종이백에 포장된 사워도우를 건네받으며 사장님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사장님, 여기 사워도우가 정말 맛있네요. 제가 사워도우에 애정이 각별하거든요. 이렇게 맛있는 사워도우는 처음이에요. 예전에 호주에서 맛본 사워도우가 너무 그리워서 파는 데를 찾고 찾다가 남구에서 동구까지 빵을 사러 왔는데 호주보다 더 맛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오죽 맛있었으면 냉동실에 빵 쟁여두려고 다른 동네까지 차를 끌고 이 빵을 사러 왔겠어요? 장담하건대, 사장님 사워도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사워 도우에요!
장황하지만 한 단어도 빠짐없이 진심이었다. 이왕 할 칭찬이라면 광주도, 한국도 아닌 전 세계를 아낌없이 써 버리자. (돈 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 말을 듣는 사장님의 표정이 그러데이션처럼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빵쟁이에게 빵이 맛있다는 말보다 더 기쁜 말이 있을까. 그냥 맛있다는 말로는 싱겁다. 칭찬에 후추도 뿌리고 소금도 뿌리고 깨도 뿌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라는 말은 구름이 되어 하늘로 떠올랐고, 이미 사장님은 구름 위에 올라탄 뒤였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소 무뚝뚝해 보였던 첫인상과 달리 어쩔 줄 몰라하며 웃으시는 사장님은 사워도우를 어떻게 조리해 먹냐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나는 올리브유에 튀기듯 먹고, 구워서 올리브유에 찍어 먹는 루틴을 말씀드렸다. 이렇게 먹는 게 맞나요? 되물었더니 기분 좋은 답변이 돌아왔다.
“정말 제대로 드실 줄 아시네요”
사장님은 내가 사워도우를 먹는 바로 그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사워도우 하나로 사장님과 나는 연결되었다. 더 가르칠 것이 없겠다는 표정으로, 한껏 들뜬 구름에서 사뿐히 걸어 내려온 사장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빵 진열대를 살핀다.
"저희 빵이 사워도우만 맛있는 건 아니거든요, 제 크루아상도 절대 세계적으로 밀리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후한 칭찬을 받았으니 저도 보답을 해야겠는데요."
어느새 내 손에는 세계적으로 밀리지 않을 크루아상도 들려있었다. 이미 사장님은 스스로를 세계적인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다. 사양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머, 그럼 꼭 맛봐야겠는데요? 감사합니다. 참 사장님, 크루아상은 어떻게 먹는 게 제일 맛있나요?"
크루아상은 내 분야가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크루아상을 아무렇게나 먹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절대 칼로 잘라먹으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말 맛있는 크루아상은 한 겹씩 벗겨먹어야 맛있다고. 나는 공짜로 크루아상을 먹게 된 것도 모자라 평생 두고 써먹을 크루아상 먹는 방법까지 획득한 것이다.(크루아상을 먹을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전문가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하면서 한 겹 한 겹 벗겨 먹으라는 사장님의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 저녁 식사시간에 사모님께 내게 들은 칭찬을 전할지도 모른다. 타지에 사는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오늘 어떤 칭찬을 들었냐면..."하고 젠체하실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칭찬은 한 사람의 하루와 평생을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로서, 나의 칭찬이 베이킹이 고단하고 힘든 어느 날 보람을 끌어내는 한마디가 되기를 무척 바랐다. 내 칭찬은 사장님의 머릿속에 부유하며 한동안 손님들에게 더욱 맛있고 건강한 빵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내 멋대로 상상해 본다.
TMI. 이후로도 이 빵집을 갈 때마다 서비스를 받았다. 고객 카드에 나에 대한 메모가 남겨져 있음에 틀림이 없다. 아마 '멀리서 오신 고객님 잘 챙겨드릴 것'이라고 쓰여 있지 않을까? 나는 더 자주 가고 더 맛있는 빵을 먹게 되었다.
오늘 사장님과 나, 두 사람에게 없던 것이 하나씩 생겼다. 나에게는 쿠르아상이 생겼고, 사장님에게는 자부심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이 ‘무’에서 ‘유’를 탄생시킨 것이다.
뻔한 말이지만 나는 말이 주는 기쁨을 각별히 의식하며 살고 있다. 말은 크게 비용을 들이 않고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부모님께도 아낌없이 줘도 동나지 않는다.
내 앞의 상대가 가족이든지, 지인이든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끊임없이 상대가 멋진 이유를 찾는데 칼로리를 소모한다. 그 일은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만큼 가치 있다. 진심 어린 칭찬과 노력에 대한 격려는 상대에게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은 때로 하루 종일 상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작은 격려와 관심, 칭찬으로 충만한 날들을 늘 고대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오늘도 나는 칭찬거리를 찾는다. 오롯이 말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세상에 없던 행복을 탄생시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