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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by 새이버링

“내가 가르치다가 애 잡겠더라고. 결국 수학학원 보냈더니 이젠 국어도 보내야 한다네. 원비가 얼만 줄 알아? 1시간에 4만 원이래. 언니도 알지. 나 진짜 안 쓰고 안 먹는 거. 내가 다 가르칠 수 있는 내용인데, 애들은 대체 왜 학원에 가야만 공부를 하는 걸까? 휴... 하나만 키우는 언니는 진짜 내 맘 모를 거다.”


주이는 전화기에 대고 언니 주연에게 하소연을 하며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다 아껴도 아이들 교육비만은 미래를 위한 투자니 아끼지 말라는 인스타그램 캠페인이 성행을 했다. 그런 돈 아끼면 애들 다 크고 나서 후회한다나 뭐라나. 주이는 올해 새 옷 한 벌 없이 두 계절을 보냈다. 여름 내내 교복처럼 입었던 반팔은 살이 찐 언니가 안 맞다고 준 신상 티셔츠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 하던 외식도 한 번으로 줄였고, 식탁은 점점 단출해졌다. 아껴야 한다는 강박이 최고조에 이른 날이었다.


“띠띠띠 띠띠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다음에 통화하자. 진혁 씨 왔나 봐.”


주이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연일 밤늦게 귀가한 남편을 어떤 눈빛으로 째려보고 응징할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진혁의 손에는 커다란 황토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내가 뭐 사 왔게~?”


볼이 발그레진 진혁은 봉투를 앞으로 내밀며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 힘을 잔뜩 준 주이의 얼굴 앞에 봉투를 내밀고 흔들었다. 갓 튀긴 치킨 냄새가 주이의 코를 찔렀다.


“요새 치킨값이 얼만 줄 알아? 안 그래도 애들 교육비 때문에 허리띠 졸라매고 있는데, 애들 다 자는 이 늦은 시간에, 건강에도 안 좋은 치킨을 사 오고 난리야! 도대체 자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니 난...”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려 치킨을 포장해 뛰어 왔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안 그래도 취기에 발그레한 진혁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주이는 미동 없이 눈알만 굴려 밤 11시 50분을 지나고 있는 시계를 쏘아봤다. 밀키트 가격이 외식비와 맞먹으니 한 푼이라도 아껴 보려고 냉장고를 털어 겨우 저녁을 해결한 날이었다고 일갈했다. 어떻게 아낀 식비인데, 2만 원도 넘는 치킨을, 그것도 늦은 밤중에 사 왔냐고 쏘아붙였다. 끼니가 됐을 치킨은 늦은 밤 환영받지 못했다. 불어난 사교육비로 빠듯해진 살림을 아느냐고 진혁에게 쏘아붙였고, 술이 늘어지게 취한 진혁은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야, 나도 야근하고 상사 비위 맞추는 거 힘들거든? 집에서 밥 해 먹이는 게 뭐 대수라고, 세상에 너만 애 키우냐? 남들 다하는 당연한 거를 가지고 사람을 문전박대해? 너, 지금 내가 이깟 치킨 한 마리 샀다고 현관문 열자마자 사람을 병신 만드는 거냐? 에잇!”


진혁은 손에 든 치킨을 힘껏 현관 구석에 내동댕이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방에 들어가 버렸다. 잔뜩 성난 진혁이 무섭고 울화가 치밀어 팔짱만 끼고 서 있던 주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아무리 그렇다고 나한테 저렇게 심한 말을 해?’


안절부절못하던 주이는 초조했다.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가는 경찰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 하지만 저렇게 심한 말을 한 것도 처음이다. 주이 또한 진혁에게 이렇게 심한 바가지를 긁기는 처음이었다.

안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이라도 마시러 나올 사람이 쥐 죽은 듯 조용하자 주이는 조용히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운 방에서 진혁은 양말도 벗다 만 채로 딸아이 옆에 새우같이 쭈그려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그렇게 화내고도 잠이 오냐? 나쁜 놈...’


진혁을 발로 밀어버리고 싶었다. 침대에서 툭 떨어져 신음하는 꼴을 봐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현관 구석에 쏟아지기 일보 직전인 치킨봉투가 보여 식탁 위로 가져왔다. 치킨은 무사했다. 봉투에서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튀긴 지 한 시간도 안 된 게 분명했다. 카레가루와 튀김 냄새를 맡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주이는 오늘 아이들이 남긴 음식으로 대충 저녁을 때웠다. 아까 언니 주연에서 한 시간 동안 하소연을 쉬지 않고 하느라 더욱 허기가 졌다. 그녀는 치킨 봉투 속에서 날개 한 조각을 꺼내 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잡내하나 안 나는 맛있는 치킨이었다.


‘맛있네... 어디 치킨이 이렇게 맛있지?’


봉투 안에는 주이가 좋아하는 고구마튀김과 닭똥집 튀김도 들어 있었다. 갑자기 주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허기와 허무함이 치킨 한 조각으로 해소되는 어이없는 순간, 서러움이 밀려왔다.


‘하...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돈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애꿎은 남편에게 풀어놓고 닭 날개를 뜯고 있는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좀 전의 화는 허기 탓인가. 고요한 거실은 치킨 씹는 소리로 가득했다. 고구마튀김은 왼손에 든 채 오른손으로 치킨무를 집어 오도독 씹었다. 양이 꽤 많아 서너 조각을 집어 먹었는데도 봉투가 묵직했다. 대충 허기만 달랜 뒤 남은 치킨은 밀봉해 냉장고에 넣었다. 내일 에어프라이어에 데워서 아이들 간식으로 주면 좋아할 것이다. 치킨과 함께 동봉된 캔콜라를 따서 꿀꺽꿀꺽 마신 뒤 베란다 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늦가을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결혼 후 남편과 돈 때문에 다툰 적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의 키와 함께 불어난 사교육비는 맞벌이 부부의 소박한 예산을 초과했다. 정확히는 영어학원비 35만 원과 수학학원비 30만 원을 합쳐 총 65만 원의 지출이 추가됐다. 초등학교 5학년을 엄마가 가르친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키오스크 사용법을 가르치는 일 같았다. 스크류바처럼 비틀어 놓은 서술형 수학문제는 이게 수학문제인지 국어문제인지 당최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아직 레벨테스트 한 번을 안 봤냐는 타박과, 노련한 수학 선생님 있는 학원에 자리 났으니 생고생 그만하고 믿고 따라오라는 이웃 진규엄마의 말에, 4년간 사교육 없이 자기주도학습을 외치던 주이는 무너져 버렸다. 수학학원을 보내기로 결심했을 때 진혁은 “그깟 30만 원이 뭐라고, 내가 안 쓰고 안 먹으면 되지.”라며 제법 적극적인 교육열을 내비쳤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그의 씀씀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주이는 마음속 병이 깊어만 갔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주이는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그럴수록 눈빛은 말똥말똥 해졌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인생이 아니야...’


그때 식탁 옆 선반 위 희고 번쩍이는 것이 주이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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