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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는 전집이 없잖아.

by 새이버링

소파에 누워 뭔가를 끌어 안고 짧게 눈을 붙인 주이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 못하는 남편의 기척에 잠을 깼다. 진혁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주이의 눈치를 슬슬 봤다. 뭔가 미안한 일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 상황인 것만은 확실했다. 주이는 밤사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절하게 꿀물을 타서 식탁 위에 놓으며 빈정댔다.


“좋~~~겠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늦~~~게까지 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자기야, 그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봐. 어제 내가 술 안마시고는 못 배기는 일이 있었다니까? 김 과장 알지? 팀원들한테 커피 한 잔 안 사는 그 짠돌이 말이야. 어제 부장님한테 들었는데, 지금 김과장은 20평대 전세 살면서 임대료 받는 건물이 서울에 세 채나 있대. 근데 더한 게 뭔 줄 알아? 김과장 와이프가 몇 년 전에 산 비트코인이 지금 1억까지 올라서 그거 팔고 캠핑카를 산다는 거야. 완전 기가 막히지? 휴... 남들은 잘도 하는 그걸 나는 왜 못했는지. 지금이라도 비트코인 열차 탑승 해야하나...”


해명할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남편의 신세한탄에 주이는 어젯 밤 사정없이 긁었던 바가지가 떠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견지명이 있어 비트코인을 매수했다는 김과장의 와이프는 어쩌면 그리도 용감할까? 그런 와이프를 둔 김과장은 자신이 아무리 짠돌이라고 놀림을 받아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것이다. 남편은 분명 그런 와이프를 둔 김과장이 부러웠을 것이고, 그런 행운도 없는 주이를 생각하며 쓸쓸했을 것이다. 어젯밤 선 넘은 진혁의 실수 따위는 입에 담기도 싫어 꺼내지 않았다. 지금 주이에게는 진혁을 타박하는 일 보다 밤사이 결심한 계획을 설득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잔소리 카드는 아껴두기로 했다.


마침 세탁기에서 세탁 종료를 알리는 알림음이 울렸다. 주이는 세탁기 문을 열고 탈수된 빨래들을 꺼내 라벤더향이 나는 시트를 한 장 뽑아 함께 건조기로 밀어 넣었다. 자잘한 양말들을 수고롭게 일일이 널지 않아도 되는 빨래건조기, 5년 전 결혼기념일에 큰 맘 먹고 들인 식기 세척기, 결혼 10주년 선물로 설치한 식기세척기 덕분에 워킹맘 주이의 노동은 훨씬 줄었다. 주이는 건조기 실행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소리와 함께 건조기가 힘차게 돌아갔다.


“건조기가 빨래 다 말려주지, 외출하고 돌아오면 로봇청소기가 다 청소해 주지, 밥 먹고 나면 설거지도 다 해주지... 돈도 이렇게 모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놀고 있는데 계좌에 잔고는 차곡차곡 쌓이는 그런... 마법?”

“자기 말대로 돈이 돈을 벌려면 종잣돈이 많아야지. 투자금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나 돈을 좀 벌어볼까?”

주이는 진혁의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반가운 표정을 물었다.

“갑자기?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응, 내가 기똥찬 아이템이 생각났어.”

“뭔데?”

“시드니에 전집 차리면 잘 될 것 같지 않아?”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주이를, 진혁은 싱겁게 모른 채 했다. 다른 날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 말라고 할텐데, 어젯밤 지은 대역죄가 진혁의 입을 막았다.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돈을 벌려면 세상에 없는 유일무이한 걸 해야 된대. 우리 지난 겨울에 애들이랑 시드니 갔었잖아. 시드니에는 네네치킨도 있고 신전떡볶이도 생겼는데 전집은 없더라. 내가 17년 전 워킹홀리데이로 시드니에 갔을 때도 없었는데 지금도 없더라고. 뭐겠어, 이건 나한테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라는 계시야. 내가 시드니에 포장 전집 차리면 대박 날 것 같지 않아?”

“현실적으로 생각해, 주이야.”


주이는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진혁을 보며 보채듯 말을 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어. 전과 똑같이 생각하면서 다르게 살기를 바라는 건 바보짓이라고. 맞잖아? 난 이제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계속 이렇게 돈에 치여, 육아에 치여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하는 것 그만 하고 시드니에 전집, 세상에 없는 유일무이한 일! 그거 내가 해보려고.”


진혁은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을 더듬어보려 애썼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룻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르게 산다느니 선언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제 일을 묻기가 두려웠다.


“그래. 근데 주이야, 여행은 여행일 뿐이야. 현실적으로 어떻게 시드니에다 전집을 차린다는 말이야?”

“나 육아휴직 하려고. 애들 데리고 시드니로 갈 거야.”

“뭐? 돈은?”

“역시나 돈 얘기를 왜 안 꺼내나 했네. 은행에 넘쳐나는 게 돈 아니야? 어차피 휴직 끝나면 평생 회사 다닐 건데 가불 하지 뭐.”

“마이너스통장?”

“응. 안 되면... 퇴직금이라도 미리 당겨서?”

“사업이 뭐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러다 망하면?”

“자긴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더라? 왜 안 될 생각부터 해? 1년 동안 해보고 안 되면 복직하고 회사 열심히 다녀야지, 나에겐 월급 보험이 있으니까.”


분명 바가지를 긁을 거라 생각한 진혁의 예상은 빗나갔다. 요즘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 맨 와이프에게 술도 안 마시고 학원비 모은다고 했던 게 엊그제인데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어젯밤이 후회스러웠다. 지금은 아내에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한 상황이니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그래. 한 번 알아봐. 혹시 알아? 진짜 우리 와이프 김치전이 대박이 날지, 솔직히 자기 김치전 진짜 맛있긴 해.”

“오~~~~ 그치? 내 김치전 진짜 맛있지? 호주사람들도 깜짝 놀랄 맛이지?”

“엄마 김치전이 진짜 맛있긴 하지!”


달콤한 늦잠에서 깨어난 아들이 식탁 앞에 앉은 엄마를 등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주이는 곧 주이의 키를 추월할 만큼 자란 아들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해줬다.


“역시 우리 아들밖에 없네. 이따 저녁에 김치전 해줄게! 오징어 듬뿍 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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