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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by 새이버링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주 여행을 와 줘야 이 나라도 먹고살지, 안 그래요?’


주이는 방금 마지막 남은 인류애까지 무너뜨리고 유유히 가게를 떠난 한국인 손님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아 한숨이 났다. 넓은 땅덩이와 풍부한 천연자원 덕분에 호주 대표 산업은 관광업이 아니다. 오히려 무분별한 해외 관광객 유입으로 자연이 오염되고 현지 규범을 위반하는 사례가 늘어 현지인들은 관광객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단다. 아직도 한국인 중에 호주가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회사의 임원이라는 사람이 보인 저급한 행동에 주이는 분노가 치밀었다. 타국에서 한국인이 욕을 먹는다면 한상무 같은 사람 탓이리라!


현지인들은 대체로 카드결제를 했는데 만약 현금을 지불할 경우, 소액은 팁이라 생각하며 거스름돈을 아예 안 받기도 했다. 한상무는 팁은커녕 동포라는 핑계로 음료 가격을 깎고, 가게를 어떻게 차렸냐느니, 벌이가 되냐느니와 같이 무례한 질문을 했다. 호주가 아닌 한국에서 전을 팔았다 해도 한상무의 행동은 그야말로 ‘진상짓’이었다. 상사를 모시고 온 부하 직원의 난처한 표정만 봐도 한상무의 인성은 가늠이 됐다. 벌이가 안 돼 먹고살기 힘들다는 동포에게 콜라값 마저 깎으려는 놀부심보. 씹어 먹다 실수로 흘린 전 부스러기를 부하 직원이 서둘러 닦게 하는 자만. 공짜라고 하면 되는 대로 많이 챙겨두려는 저급한 근성. 제 신발까지 닦은 물티슈를 길에다 버리는 부도덕함. 쓰레기마저 스스로 버리려 하지 않는 갑질까지, 그야말로 '종합진상세트'였다.


주이가 과거 잠깐 다녔던 직장의 상사도 부하 직원 월급이 제 주머니에서 나가듯 직원을 부리고 성과만 쏙 빼먹었다. 당시 상사의 월급은 주이 보다 두 배는 많았는데 서류는 무조건 종이로 출력해야 했고, 근무시간 내내 빨간펜을 든 채 직원들이 올린 보고서의 띄어쓰기와 오탈자 점검에 혈안이 돼 있었다. "기본이 중요해, 기본이."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난처한 상황이 생기면 해결에 나서기는커녕 뒷짐 지고 “내가 그렇게 일하면 안 된다고 지난번에 경고했잖아, 꼭 내 말을 안 듣고 고집부리더니... “ 하며 상황 해결에 도움도 안 되는 꼰대짓을 하기 바빴다. 주이는 빨리 수습해야 할 상황에 상사의 잔소리를 듣고 시간을 허비하려니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선배들은 그런 상사를 견딘 대가로 받는 게 월급이라고 어쭙잖은 위로를 했다. 어떻게든 승진을 하라고 했지만 ‘어떻게든’의 유일한 통로는 일을 기깔나게 잘하거나 상사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탕비실에서 ’남자 직원들이 회식과 야근으로 회사를 짊어지는 동안 여직원들은 지새끼 챙기느라 집에 가기 바쁘다.‘는 말을 엿듣고는 퇴사를 결심했다. 지금 잠시 휴직한 회사는 그전 회사에 비해 급여는 적었지만 최소한 성차별이나 상사의 갑질 같은 부조리함은 없었다. 다만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일을 쉬고 싶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극심한 생리통 탓에 굽어지는 허리와 찌그러진 미간을 애써 감춰야 하는 게,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 전화한 아이들에게 되려 ‘왜 그런 사소한 일 가지고 전화를 하니?’라고 아이를 타박해야 했던 스스로가, 분주한 출근 준비로 여유롭게 아침공기를 호흡하지 못했던 게,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 동안 누릴 수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선물의 포장지를 뜯어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지금은 시드니 전집 앞에 종일 서서 전을 부치고, 벌이는 회사 월급의 절반도 안 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오픈 이후로 손님이 줄을 선다거나 한 손님이 전을 수십 개를 사간다거나 하는 놀라운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성실하게 같은 시간 서서 전을 팔았다. 전은 혼자서 부쳐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팔렸다. 주이는 시드니에서 유일무이한 사업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포부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유치원생의 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시드니에 전집을 차렸다는 사실만으로 주이는 충만했다. 한상무 같은 진상 손님, 매일 같이 ‘오늘은 전 몇 장 팔았어?’라고 묻는 남편 진혁을 견뎌야 했지만 그 정도 스트레스는 잠들기 전 맥주 한 모금과 잠시 함께인 언니와의 수다로 금세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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