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전과 해물파전은 매일, 산적은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부치기로 했다. 오늘부터 일주일 간 손님의 반응을 살핀 뒤 메뉴를 조정할 생각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9시부터 준비해 가게 문을 열었다. 어젯밤 미리 준비해 둔 재료가 든 컨테이너 박스들을 매대 안쪽 조리 공간에 나란히 꺼냈다. 시드니에서 정착할 때까지만 주이를 돕기 위해 따라온 언니 주연은 첫 번째 컨테이너 박스에 물과 부침가루, 손질한 오징어와 다져놓은 김치, 기름 뺀 참치를 넣고 뒤섞었다. 주이는 미리 달궈둔 팬에 주연이 뒤섞은 반죽을 적당히 덜어 붓고 차례로 뒤집었다. 하나씩 뒤집을 때마다 예언 섞인 계시를 읊조렸다.
‘이 전으로 시드니에서 대박 나게 해 주세요. 제발.’
주연은 갑자기 눈을 꼭 감는 주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초벌로 부쳐둔 전이 사방으로 수증기를 뿜어내며 주홍색 자태를 뽐냈다.
“언니 하나 먹어도 돼?”
“당연하지! 이걸로 먹어봐, 저건 초벌용이고 이건 방금 다 익힌 거야.”
“음... 진짜 맛있네. 시드니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다.”
지체없이 전을 베어문 주연의 입에서 바사삭 소리가 났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한 식감. 신맛과 짠맛과 단맛의 절묘한 밸런스. 전을 씹다가 방심할 때쯤 치고 들어오는 청양고추의 매운 맛까지. 순간 주연은 살면서 김치전을 몇 번쯤 부치면 이런 맛이 날까를 궁금해하곤 나머지 전을 반으로 접어 크게 한 입에 털어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맛있는 음식은 아껴 먹는 것보다 입 안을 가득 채워 호사를 극대화하는 게 더 짜릿하다. 주연은 손에 묻은 기름을 키친타월로 닦으며 물었다.
“아휴, 진짜 맛있네. 맛있다는 칭찬 밖에 못해 미안하다. 참,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는 꿈을 꿨단 말이지?”
“응. 진짜 한 명도 안 오진 않겠지?”
“그럴 리가 있어? 첫날이니까 너무 기대는 말자. 일단 내 입에 맛있으니까 합격. 요샌 어딜 가나 K푸드가 인기니까 이것도 분명 외국인들이 좋아할 거야.”
주이는 사각틀 안에 주연이 섞어 준 계란을 붓고 길쭉한 햄, 게맛살, 파, 버섯, 당근을 가지런히 올렸다. 원형틀과 사각틀은 일관성 있게 전을 부치려고 한국에서 구해왔다. 계란이 익으면 차례대로 뒤집고 가장자리에 덕지덕지 엉겨 붙은 계란옷을 뒤지개로 정돈한 뒤 완성된 산적은 채반에 담았다. 오색 산적이 나란히 담겨 있으니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판매 가격은 재료의 원가, 가게 임대료, 시드니의 물가 등을 고려해 오징어김치전은 $8, 해물파전은 $9, 산적은 $6로 정했다. 점심 가격이 $15을 웃도는 시드니에서 가볍게 끼니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재료는 리드컴에 있는 아시아 식자재 마트에서 구입했다. 그곳은 마치 한국의 하나로마트 같았다. 가격이 원화가 아닌 $로 적힌 것 빼고는 버섯, 맛살 같은 웬만한 한국 식재료는 모두 구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김장김치는 한국의 부모님으로부터 선편을 통해 받기로 했고, 부족하면 시드니에서 구매한 김치를 잘 익혀 만들기로 했다. 눈이 감길 정도로 새콤한 묵은 김치는 맵고 깊은 맛이 나서 좋았지만 시드니에서 구매한 종갓집 김치도 상온에 익히니 새콤 매콤한 감칠맛이 났다. 기름을 잘 흡수하는 전통문양 유산지는 쿠팡에서 해외배송으로 주문해 받았다.
주이가 담양에서 직접 공수한 대나무 채반 위에 전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됐다. 지나가는 현지인들은 채반 위 오색산적의 현란함에 엄지 척을 해 보였다. 음식사진 아래 이름과 재료를 친절하게 적은 엑스배너가 매대 우측에 세워져 있었는데 손님들은 메뉴에 대한 설명을 찬찬히 읽고 나서 “One Pajeon Please.” 하는 식으로 주문했다. 외국인의 입에서 한국음식 이름이 발음될 때 주이는 애국자가 된 기분에 심장이 짜릿했다.
첫날에는 홍보차원에서 무료시식으로 현지인들의 반응을 살폈다. 소주잔 크기의 종이컵에 잘게 자른 전을 하나씩 넣고 이쑤시개를 꽂았다. 우리나라 마트의 시식코너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이쑤시개가 꽂아진 이 전도 판매하는 줄 알았는지 처음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이는 급하게 종이를 두 번 접어 ‘Free for everyone.(무료)’라고 써진 팻말을 붙였다. 그제야 동양인 몇몇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Help yourself.(마음껏 드세요.)”
맛을 보고 나서 하나씩 구매하는 사람 절반, 칭찬만 지불하고 떠난 손님이 절반이었다. 주이는 매출을 욕심 낸 하루가 아니니 마음을 편히 먹기로 다짐했지만 내심 칭찬만 지불한 손님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맛있다고 했으면 사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한 중국인은 뉴잉턴의 한국식당에서 김치전에 막거리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먹는 전이 훨씬 맛있다고 극찬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주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주이가 전 부치는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는 손님들은 마치 서커스를 보는 관객처럼 눈에 호기심이 그렁그렁했다.
주이는 어젯밤 잠들 기 전 김치전이 불티나게 팔리는 상상을 했지만 전이 하나도 안 팔리는 악몽을 꿨다. 설마 내일부터 이 악몽이 현실이 되진 않겠지. 준비한 재료를 모두 소진한 첫날, 마음에도 없는 하소연을 늘어놨다.
“언니, 내가 왜 여기서 전집을 차린다고 했을까?”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오늘 얼마 번 줄 알아? $200도 못 벌었어... 매달 월급 따박따박 넣어주던 회사가 더 나았을까 싶고... 매일 이렇게 조금만 벌진 않겠지?”
“당연하지, 오늘 온 사람들이 전이 진짜 맛있다고 하는 거 안 봤어? 다 내일도 온다고 했잖아. 첫날이라 그래,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오늘은 복잡하게 그런 생각하지 마. 언니가 정리할 테니까 이거 마시면서 넌 좀 쉬어.”
주연은 시원하고 묵직한 핑크색 분다버그를 따서 주이에게 내밀었다. 달고 쓴 탄산이 주이의 목구멍을 사납게 두들겼다. 온몸이 쑤시고 허리도 욱신거렸다. “아...” 신음소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이의 손가락 전체가 벌겋게 데인 것 같이 얼얼했다.
‘역시... 쉬운 게 아니었어...’
기진맥진한 채로 주저앉은 주이의 의지와 무관하게, 머릿속에 갑자기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손재주가 남다른 주이는 토끼풀로 반지 만드는 걸 반에서 가장 잘했다. 친구들은 주이에게 팔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언젠가부터는 이 재주로 돈을 벌어 보고 싶었다. 그때 텅 빈 상가가 떠올렸다. 등굣길에 문을 닫은 상가가 하나 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는지 비어 있었다. 며칠간 고민만 하다 뭔가에 홀린 듯 학교 운동장에서 미친 듯이 토끼풀을 뽑아왔다. 날이 새도록 팔찌와 반지를 만들었다. '거기서 내가 토끼풀 액세서리를 팔면 손님들이 벌떼같이 몰려들겠지?' 재주를 팔아 볼 생각에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던 주이는 다음 날 하굣길 그 상가에 만두집 간판이 달리고 미닫이 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보았다. 그날 밤 집에서 수북이 쌓인 토끼풀과 함께 날이 새도록 하염없이 울었다. 하필 지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걸까? 주이는 스스로에게 중얼이며 말했다.
"최주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김치전이 토끼풀 보단 낫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