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전집에 단골손님 세 명이 생겼다.
헨리는 패디스마켓에서 과일과 야채를 파는 인도 청년이다. 영업 첫날 시식용 파전을 맛본 뒤 전맛에 홀딱 반했는지 하루 걸러 하루 꼴로 매일 전을 사 먹으러 왔다. 한 번은 주먹밥을 싸 와서 산적과 함께 먹으면 맛있다고 그 자리에 서서 점심을 먹고 간 적도 있다. 해물파전을 먹을 때에는 전을 손에 쥔 채로 해물을 하나씩 쏙쏙 빼먹으면서 주이가 전 부치는 것을 관찰했다. 끓인 간장에 잘게 썬 청양고추와 양파를 절여 $1에 판매하는 Secret Source(비법소스)를 매번 사갔다. 양파의 가냘프게 매운맛을 좋아했고, 파전의 바삭함을 감탄했다. 소스에 절인 양파와 덜 익은 파를 즐겨 먹는 젊은 청년이 기특하다는 생각에 주이는 서비스를 얹어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헨리도 납작 복숭아나 바나나를 두어 개씩 들고 와 주이에게 내밀었다. 헨리는 과일 고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납작 복숭아 당도는 혀가 얼얼할 정도였고 바나나는 이제껏 맛본 적 없는 진하고 향긋한 맛이었다.
백발의 리사는 TAFE에 다니는 만학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자녀를 키우느라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주문한 전이 완성되는 동안 주이 앞에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준비물을 집에 두고 와서 다시 가지러 가느라 학교에 지각한 이야기, 젊은이들과 조별로 과제를 수행한 이야기, 때론 알아들을 수 없는, 주이가 궁금하지 않은 일상들을 꺼내 놓았다. 리사는 주이가 모든 영어를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리사가 말한 영어를 해석하고, 대답을 다시 영어로 번역해 답하느라 전을 부치는 주이의 등에선 땀이 뻘뻘 났다. 장사를 위한 스몰토크는 흥겨운 일이지만 기나긴 서사로 나누는 대화는 가혹했다. 손과 뇌가 멀티태스킹에 실패할 때면 번번이 손을 뎄다. 주이는 차마 리사 앞에서 '앗!'소리를 낼 수 없어 잠시 양해를 구하고 냉동고 속에서 아이스팩을 꺼내 왔다. 매대 아래로 손을 내린 채로 아이스팩에 손을 지그시 눌렀다. 그런 줄도 모르는 리사는 갓 구운 해물파전을 주이 앞에서 천천히 먹었다. 몇 개의 전을 포장한 뒤에도 식은 전을 프라이팬에 다시 데워도 되는지, 데울 때 어떤 기름을 써야 하는지, 냉동보관이 가능한지, 직접 만들어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물었다. 손주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찍은 사진, 오색산적을 멋지게 플레이팅 한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고 ‘#KOREAPAJEON#AWESOME #MYFAVORITE’라고 태그를 단 게시물을 주이에게 자랑했다. 팔로우가 10명 밖에 안 됐지만 홍보를 열심히 하고 있다며 으스대는 리사는 주이의 눈에 사랑스러운 이모 같았다.
시드니전집의 개점 공신이자 첫 단골인 수지가 왔다. 외근이 잦은 수지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러 가게를 점검하고 주이의 안부를 물었다. 매대와 주방이 멀어서 불편하진 않은 지, 전기나 수도에 문제가 없는 지를 묻고 파전과 김치전도 직접 사 먹었다. 주이는 돈을 안 받겠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공짜로 먹는 전은 맛없다며 한사코 현금으로 전 값을 지불했다. 수지가 떠날 때마다 주이는 전과 비법소스를 포장한 종이백을 그녀의 손에 꼭 쥐어줬다.
"어후, 이렇게나 많이요? 저 다 못 먹어요."
“남은 건 냉동실에 얼렸다가 해동해서 에어프라이기나 프라이팬에 데워 먹어도 맛있어요.”
“안 주셔도 되는데... 그럼 챙겨주신 거니 맛있게 먹을게요! 피곤한 날엔 시원한 맥주랑 먹으면 진짜 맛있더라고요. 참, 저번엔 남자친구가 한인슈퍼에서 사 온 막걸리에다가 먹었는데 남은 전 한 조각 때문에 싸웠다니까요? 호호... 참, 작은아버지랑 오전에 통화했는데, 작은 어머니 수술이 잘 끝났대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워낙 연세도 있으신 데다 큰 수술이라 회복하는데 서너 달은 걸릴 거라고 해요. 회복하면서 친지분들과 여행도 하고 요양도 하면서 한국에서 휴가 보내다 오신대요. 지금 제주도도 가야 하고 울릉도도 가야 한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시던지... 안 아프셨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하려다 참았어요. 가게에서 당분간은 편하게 장사하셔도 될 것 같아요.”
“잘 됐네요. 다음에 호주 오시면 꼭 찾아뵙고 감사 인사 드려야겠어요.”
“서로 좋은 건데요 뭐, 작은아버지도 가게가 비어 있었다면 아마 작은어머니한테 빨리 호주 가자고 보채셨을걸요? 짧은 기간이라 누구 세를 내줄 수도 없고, 저희한텐 언니가 은인이에요. 참, 저 외근 나온 거라 미팅이 있어서 얼른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 주에 또 올게요!”
주이는 당분간은 이 가게에서 전을 팔아도 되겠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동시에 밀려와 깊은 한숨을 쉬었다. 10시에 문을 연 시드니전집은 여느 시드니의 카페들처럼 3시에 문을 닫는다. 수지의 방문으로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등록한 어학원 수업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양손을 뻗어 기지개를 켠 뒤, 남은 재료와 반죽을 잘 덮어 냉장고에 넣었다. 그때였다.
“잘 지냈어?”
주이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