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자작나무 숲이 눈앞에 펼쳐지고 배우는 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 숲을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이것은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조다.
연극 <렛미인>은 욘 A. 린드크비스크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스웨덴에서 처음 영화로 제작되었고 이후 미국에서 제작되어 인기를 모았다. 연극은 원작을 해치지 않으며 방대한 이야기를 적절히 무대화했다고 소설과 영화를 모두 본 친구가 말해줬다.
열세 살 오스카는 주정뱅이 엄마와 단 둘이 살며 학교에선 따돌림을 받는다. 오스카가 사는 동네 숲에선 살인사건이 일어나 동네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에게 맞은 오스카는 숲에 들어갔고 이곳에서 이상한 냄새를 풍기지만 묘하게 끌리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일라이. 그는 소녀도 소년도 아닌 뱀파이어다. 오스카가 일라이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이미 둘의 사랑의 깊어졌을 때이다. 연극은 불멸의 뱀파이어와 필멸의 인간의 사랑과 고독을 이야기한다.
연극 <렛미인>은 무척 서정적이다. 춤을 추듯 아름다운 배우들의 움직임, 그 움직임에 최적화된 음악으로 때때로 무용극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연극의 템포는 다소 느리다. 이 느린 진행으로 관객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읽는 기분을 갖게 된다. 오스카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제외하면 배우들의 대사도 느리다. 특히 뱀파이어인 일라이는 인간과 다른 성조와 리듬으로 대사를 한다. 그런데 이 느린 진행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신선하다.
연극 <렛미인>은 존 티파니 연출, 스티븐 호겟 안무, 올라퍼 아르날즈 음악으로 레플리카 프로덕션의 오지지날 팀이 총출동하여 신시컴퍼니가 제작했다.
안승균 배우와 백승연 배우는 10대 초반 소년과 소녀를 완벽하게 재연했다. 백지처럼 하얀 피부에 움직임이 특히 아름다운 백승연 배우는 검색을 해보니 신인이었다. 낯선 재능 있는 신인 배우를 일라이로 캐스팅한 것은 뱀파이어라는 존재에게 거리를 갖게 하려는 의도 아니었을까? 원작과 비교해 캐릭터를 순화한 하칸 역의 지현준 배우는 특유의 저음으로 슬픔을 배가시킨다. 조연들의 연기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안정적이다. 무려 1200명의 지원자 중 발탁된 배우들이라니 어떤 캐스팅을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오스카와 일라이가 뛰어놀던 정글짐은 수영장으로 바뀐다. 수조에 물이 실시간으로 채워지면 관객들의 긴장감도 최고조에 이른다. 아찔하다. 객석에서 작은 탄성이 나온다.
인터미션을 포함해 140분의 상연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순식간에 그리고 느리고 깊게 극에 빠져든다. 프리뷰 기간이어서인지 대사 실수도 음향 실수도 다소 잦았다는 것이 결점이라면 결점. 조금 완성도가 높아진 작품을 조금 더 앞에서 보기 위해 바로 한 회 차를 더 예매했다.
보시라. 느린 진행이 선사하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경험하시라. 8월 1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극본 | Jack Thorne
연출 | John Tiffany
무대 디자이너 | Christine Jones
무브먼트 디렉터 | Steven Hoggett
출연 | 백승연 안승균 지현준
박지원 차정현 이의령
정우재 강재민 진준형
조명 디자이너 | Chahine Yavroyan
음향 디자이너 | Gareth Fry
해외협력 연출 | Luke Kernaghan
해외협력 무브먼트 디렉터 | Eddie Kay
국내협력 연출 | 이지영
국내협력 무브먼트 디렉터 | 김준태
번역 | 황석희
제작 | 신시컴퍼니